가요현대사(3) 1964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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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3) 1964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②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6.2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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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3)

1964년 한국의 대중가요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대히트한 해로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촉발된 신가요의 붐이 다시 트로트로 급선회하지만 미8군쇼 출신 가수들의 활동 또한 대단했다. 최희준은 <맨발의 청춘>으로 최고의 남자가수로 떠올랐고,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와 <보고 싶은 얼굴>은 지금도 애송되는 명곡들이다. <그리운 얼굴>(한명숙), <저녁 한때의 목장풍경>(위키리)도 유행했고, 영화주제가였던 <빨간 마후라>(쟈니브라더스)는 대만과 동남아에서도 널리 불린 노래였다.
김상희가 <처음 데이트>로 첫 히트곡을 내놓았고, 박재란의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눈물의 연평도>(최숙자), <아빠의 청춘>(오기택), <내일 또 만납시다>(금호동)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64년 가요계 또 하나의 사건은 신중현의 애드포(Add 4)와 키보이스가 그룹사운드의 출발을 알리며 ‘젊은이들만의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맨발의 청춘

1964년 2월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한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은 곱게 자란 외교관의 딸(엄앵란)과 뒷골목 범죄단의 말단 조직원(신성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는 ‘청춘영화’ 붐을 일으키며 신성일·엄앵란 콤비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사실 <맨발의 청춘>은 일본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나카히라 코우, 1963)>을 표절한 작품이다. 일본과 국교를 맺기 전이었고, 표절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시절에 한국 영화인들 중 일부는 일본영화 속의 장면과 설정들을 베끼기도 했다.
그러나 <맨발의 청춘>이 가지고 있는 매력, 그리고 그 시절 이 영화에 감동 받았던 사람들의 정서적인 울림까지 폄하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당대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먼저, 신성일의 매력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여기에 영화의 엔딩에서 동반자살로 사랑을 완성한 두 사람이 각각 달구지와 영구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통해 계급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연출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때 거적에 덮인 채 달구지에 실려 가는 주인공 두수(신성일)의 맨발이 삐져나온 장면은 당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슬픔도 한 숨도 모두 다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리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로 시작하는 이봉조 작곡 최희준의 주제가 역시 잊을 수 없는 명곡이다. 재즈 분위기의 색소폰 연주가 헐리우드 갱 영화를 연상시키는 전주와 간주에, 남성적 에너지를 절제감 있게 표현한 최희준의 보컬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맨발의 청춘>은 1964년도를 강타한 빅히트곡이었다.
이 노래를 계기로 한국 스탠더드팝 계열의 대중가요는 1950년대 후반부터 이어온 작곡가 손석우 중심의 밝고 단정하며 단순한 스탠더드 팝의 유행이 저물고, 재즈와 블루스 등이 가미된 풍부한 느낌의 스탠더드 팝으로 전환된다. 재즈의 어둡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머금은 이봉조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극성을 지닌 길옥윤의 흐름이 이어진다.

 

▲가수 최희준

1960년대 풍미한 가요계의 신사 최희준

 

최희준(1936∼2018)은 1964년부터 66년까지 동양방송(TBC)의 <가요대상> 3연패와 1966년 신설된 문화방송(MBC)의 <10대 가수 청백전>에서 초대 ‘가수왕’에 등극하는 등 1960년대 최고의 남자가수였다.
서울대 법학과 출신 가수였던 최희준은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인 한명숙, 현미, 패티김 등과 함께 미국 ‘스탠더드 팝’ 바람을 선도하며 트로트가 주류였던 가요계에 새로운 유행을  몰고 왔다. 중저음 허스키 음색의 그는 개성 있는 보컬리스트 전성시대를 주도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에 일조하기도 했다.
최희준의 히트곡은 전성기였던 1960년대에 집중돼 있다. 1961년 첫 히트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이후 1963년 <진고개 신사>, 1964년 <맨발의 청춘>, 1965년 <뜨거운 침묵>, 1966년 <하숙생>, <종점>, <길 잃은 철새>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가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대중가수의 품격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던 최희준은 ‘찐빵’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친숙한 이미지로 대중과 소통했던 가수였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경기도 안양에 출마해 당선돼 ‘가수 출신 1호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가수 김상희

‘여자학사 가수1호’ 김상희

 

늘 단발머리를 하고 있던 김상희는 ‘여성 학사가수 1호’, ‘가수 출신 엠시(MC) 1호’ 등 여러  타이틀을 남기며 한국 가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첫 히트곡 <처음 데이트>를 녹음한 직후 부른 샘표간장 시엠(CM)송 덕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까지 매년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하며 인기가수로 자리했다.
히트곡들을 대략 꼽아보자면 △1964년-<처음 데이트> △65년-<울산 큰애기> △66년-<대머리총각>, <경상도 청년> △67년-<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뜨거워서 싫어요> △68년-<단벌신사>, <빗속의 연가> △69년-<빨간 선인장>, <당신을 알고부터>, <어떻게 해> △70년-<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71년-<참사랑> △72년-<팔베개> △74년-<어쩌나>, <황소 같은 사나이> △75년-<나 이제 외롭지 않네> △77년-<즐거운 아리랑> 등이다.

 

▲록그룹사운드의 효시 ‘키보이스’.

록그룹사운드의 효시 ‘키보이스’

 

1964년 비틀스가 미국 전역에서 세계 대중음악사상 전무후무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을 때, 국내에서도 신중현이 이끄는 애드포(Add 4)와 키보이스가 그룹사운드의 출발을 알렸다.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최초의 음반에 대해 지금까지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신중현이 이끌던 그룹 ‘에드포’의 첫 앨범에 담긴 <빗속의 여인>을 꼽아 왔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키보이스’가 발표한 노래 <그녀 입술은 달콤해>로 확인됐다고 가요평론가 박성서는 주장한다. 키보이스의 <그녀 입술은 달콤해>가 처음 취입·발표된 것은 1964년 7월3일. 이는 ‘에드포’의 <빗속의 여인>(1964년 말)보다 5개월 앞선다.
5인조 그룹 키보이스의 당시 멤버는 차중락(싱어), 김홍탁(리드기타), 옥성빈(리듬기타)), 차도균(베이스기타), 윤항기(드럼)였다. 이 라인업이 갖춰진 것은 1963년 늦가을. 이로써 키보이스는 한국 록그룹 사상 가장 개인기가 출중한 초호화 라인업을 갖춘다.
그러나 초기 키보이스 멤버들은 <정든 배> 등 모두 넉 장의 음반을 남기고 1967년에 해체한다. 차중락(<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 차도균은 솔로로 전향했고, 윤항기는 1971년 ‘키브러더스’를 결성했다. 김홍탁은 ‘히파이브(HE5)’와 ‘히식스(HE6)’ 등을 거치면서 당대 최고 인기그룹으로 부상하며 그룹사운드 황금기를 주도한다. 초기멤버 중 옥성빈만이 잔류하게 된 키보이스는 제2기 키보이스를 결성해 활동한다. 키보이스의 대표곡인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 등은 모두 2기 키보이스 시절의 발표곡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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