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2) 설씨부인, 조선시대 최초 여류서화가ㆍ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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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2) 설씨부인, 조선시대 최초 여류서화가ㆍ문장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7.0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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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씨부인.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진.

신말주의 정부인(貞夫人) 설씨부인은 순창설씨이다. 순창설씨는 설거백을 시조로 받들고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설자승이 1124년(고려 인종 2) 호부시랑이 되고 순화백(순화는 순창의 옛 이름)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고쳤다. 그러므로 경주는 원적(原籍)이고 순창은 본적(本籍)이다. 순창설씨는 설자승이 1126년 아내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면서 토종 성씨로 자리 잡았다.

 

덕망 높고 서화에 뛰어난 설씨부인

설씨부인(1429∼1508)은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과 형씨부인 사이에서 1429년(세종 11)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설씨부인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고 글 읽기를 좋아해 문장과 필재(筆才)가 탁월했다. 무엇보다 성품이 부드러웠고, 정숙한 덕성을 갖추어 덕망이 높았다. 또한 불교와 유교에 조예가 깊고, 서화에도 높은 수준을 갖고 있었다. 항상 근검하고 재산이 넉넉해 친척 중에 외롭거나 빈한하여 늦도록 출가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때는 결혼에 필요한 것을 갖추어 출가시켰으며 이웃에 급한 일이 있으면 몸소 나섰다고 전해진다. 신숙주의 막내 동생인 신말주와 스무살이 되던 즈음에 결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귀래정공파 신씨문중의 출발에 기여하기도 한다.

강천사를 복원하다

불가에서는 ‘부처는 곳곳에 머무신다’ 했다. 부처가 이 땅에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순창 광덕산(廣德山, 강천산의 옛 이름)에는 오래전부터 부처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곳을 광덕산 부도암(浮圖庵, 강천사의 전신)이라 불렀다. 그리고 ‘덕을 세상 밖으로 널리 펼친다’는 그 뜻을 펼친 이가 바로 설씨부인이었다. 부인은 부처의 마음을 권선문첩(勸善文帖)에 담게 된다.
남편 신말주와 함께 순창으로 낙향해 있을 때인 1482년(성종 13), 어느 봄날 밤이었다. 부인의 꿈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형씨부인이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일 어떤 사람이 찾아와 너와 함께 착한 일을 하자고 청할 것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되 게을리 하지 말라. 너의 복을 짓는 큰 근원이 되리라” 하였다.
갑자기 꿈에 어머니가 오신 것도 그러하거니와 꿈이 하도 생생해 기이하다는 생각으로 새벽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과연 약비(若非)라는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산수 절승한 광덕산에 신허라는 스님이 초가로 지은 작은 절 하나가 오늘에 이르렀는데, 오랜 풍상으로 거의 퇴락했습니다. 지금 이곳을 지키는 중조 스님의 큰 소망은 절 하나를 새로 짓는 일입니다. 소승도 광덕산의 아름다움을 탐내 부도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웠습니다. 허나 이 또한 초라하여 오래 보전할 수 없기에, 중조 스님과 힘을 합쳐 새로 절을 짓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저희 역량이 부족해 감히 부인께 시주를 구하려고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인은 간밤의 꿈을 되새기며 도와주리라 결심했다. 암자의 작은 규모로 보아 소요 경비를 혼자서도 보시할 수 있으나 대중들이 부도암 중수에 동참하는 선을 행해 다 같이 응보의 복을 받도록 권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마침내 부인은 손수 권선문을 짓고, 절간의 설계도까지 그려 서화첩으로 꾸몄다. 그리고는 약비로 하여금 부도암의 복원을 위해 더 많은 시주를 구하도록 했다.

보물 제728호 《설씨부인 권선문첩》

《설씨부인 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은 강천산에 절을 세우고 신도들에게 시주를 권하는 글을 짓고 사찰의 설계도를 그려 돌려보게 한 화첩이다.
전문이 1103자인데 원래는 한 폭의 두루마리로 된 것을 후손이 오래 보관하기 위해 한 폭에 4행 또는 5행으로 된 첩지를 16폭으로 나누어 병풍과 같이 접어 두는 족자로 만든 것이다. 전체 16폭 가운데 14폭은 권선문(勸善文)이고, 나머지 2폭은 사찰의 채색도가 그려져 있다. 문서 뒷면에는 권선문을 짓게 된 이유와 연대 등이 적혀있고, ‘성화 18년 7월 정부인 설’이라는 연대와 예인(藝印)이 찍혀 있다. 성화 18년은 1482년(성종 13)이다. 권선문은 여성이 남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문의 산문이고, 사찰 그림도 조선시대 여성이 그린 가장 오래된 채색도이다.
설씨부인권선문첩은 부도암에서 보관해 오다가 절이 쇠락하면서 스님이 신말주의 18세손인 신승재에게 돌려주어 대대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1981년 서예 전적부문 보물 제728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순창읍 가남리 고령 신씨 본가 안에 세워진 보호각인 유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현재는 국립 전주 박물관에 위탁한 상태이다.

 

▲1981년에 보물 제728호로 지정된 <설씨부인권선문첩>.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진.

‘권선문’과 ‘부도암도’의 의의

 

‘권선문(勸善文)’은 첫머리에 불교의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을 내세운 다음, 돌아가신 어머니 형씨 부인(邢氏夫人)의 현몽과 중조(中照) 스님의 명을 받은 약비가 부도암 중수에 대한 요청을 하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공개한다. 그렇게 큰 경비가 들지 않아 혼자서도 보시할 수 있으나 대중들이 부도암 중수에 동참하는 선을 행하여 다 같이 응보의 복을 받도록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권문(勸文)이란 군중들을 설득하고 깨우치는 글이다. 아무리 대가집 부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설씨부인은 당당히 계도자로 나서는 기개를 보였으니 대단히 선진적인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 황진이, 계랑 등 조선 중기 여류문인들의 작품이 거의 시조로 단문인데 비해 이 ‘권선문’은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장문의 산문으로 이뤄졌다. 서체는 여인의 글씨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한 행서로 쓰였는데, 조선 시대 전기에 풍미했던 조맹부체를 방불케 한다. 뿐만 아니라 문첩에 적힌 문장도 선을 행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복이라는 결과를 받는 인과법(因果法)에 의거해 논리 정연한 전개를 이루고 있어 설씨부인의 높은 학식을 느낄 수 있다.
강천사의 전신인 부도암(浮圖庵)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 분명한 2폭의 사찰 채색도는 여성이 그린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最古)의 산수화일 뿐 아니라 극히 드문 채색화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중엽 사임당 신씨 작품들보다 70년 이상 앞선다. 신사임당 그림은 초충(草蟲, 풀과 벌레) 위주인데다가, 오늘날 사임당의 그림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사임당이 그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른바 전칭(傳稱, 전하여 일컬음)작일 뿐이다.
위당 정인보는 1934년 순창까지 내려와 이 <설씨부인권선문첩>을 확인하고, ‘조선조 뛰어난 여류로서 문장에 있어서 설씨 부인이 사임당보다 더 솟을 것 같고 또 사임당에 비하면 선배여서 규방학사에 특필할 만한 광채’라고 그의 <담원문집>에서 극찬한 바 있다.

500년 넘게 계속되는 외손봉사

부인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손자 신공제의 지극한 효도를 받다가 80세인 1508년에 별세했다. 묘는 옥과면 합강리 광암마을에 남편의 묘와 함께 있다.
무남독녀였던 설씨 부인의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귀래정공파 신씨문중에서는 매년 음력 11월 3일 설씨부인을 기리는 외손봉사를 500년 넘게 지내고 있다. 또한 강천사에서도 사찰 복원과 관련된 부인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의 ‘명상예술제’를 2017년부터 매년 단풍이 아름다운 10월에 개최하고 있다. 설씨부인이 신씨 집안과 군민에게 이토록 높이 받들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규방문학사와 예술사를 고쳐 써야할 만큼 뛰어난 여류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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