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5) 1966년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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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5) 1966년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①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7.3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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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5)

1966년은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보수ㆍ해체 과정에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해였다. 프로 권투선수 김기수는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국내 최초로 세계 챔피언벨트를 차지했다.
해외에서의 가장 큰 사건은 중국에서 문화혁명의 광기가 막을 열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개막한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북한 축구대표팀이 우승후보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8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해이기도 하다.

‘10대 가수 청백전’ㆍ대중가요의 새로운 분위기

1966년 12월 2일 문화방송(MBC) 창사 6주년 기념으로 제1회 ‘10대 가수 청백전(가요제)’이 시민회관에서 개최됐다. 남자가수에 남일해ㆍ최희준ㆍ위키리ㆍ정원ㆍ유주용, 여자가수로는 이미자ㆍ현미ㆍ이금희ㆍ최양숙ㆍ문주란이 선정됐다.
10대 인기가수 수상자 중 남일해ㆍ이미자ㆍ문주란은 기존의 트로트 가수였지만, 최희준ㆍ위키리ㆍ유주용ㆍ정원ㆍ현미ㆍ이금희ㆍ최양숙 등 미8군 출신 팝 계열 가수가 7명이나 된다. 그리고 <하숙생>의 최희준이 이미자를 누르고 첫 번째 최고인기가수상을 차지했다.
같은 해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에서도 남자가수 대상을 최희준이, 여자가수 대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샹송 가수로 불리는 최양숙이 수상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미 팝 계열 가요가 주류 가요계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최희준, 패티김, 이미자, 김상희 ‘맹활약’
남진, 차중락, 문주란 ‘등장’

1966년에 유행한 노래들을 보면 오늘날까지 사랑 받는 노래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남자가수를 살펴보면 최희준이 <하숙생>, <종점>, <길 잃은 철새>, <엄처시하>를 발표하며  맹활약했다. 오기택이 <고향 무정>, <아빠의 청춘>으로 사랑을 받았고 <눈물을 감추고>(위키리), <갈대의 순정>(박일남), <덕수궁 돌담길>(진송남)이 발표됐다. 극장쇼의 스타들인 정원(<허무한 마음>)과 쟈니리(<뜨거운 안녕>)가 크게 사랑 받았고 키보이스에서 솔로로 독립한 차중락이 번안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발표해 크게 인기를 끌었다.
1965년에 데뷔한 남진이 <울려고 내가왔나>로 첫 히트곡을 발표했다. 신인가수 남진은 트로트, 블루스, 차차차, 트위스트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선보였다. 이에 각 레코드사들과 극장쇼 단체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트가 예견되던 <울려고 내가왔나>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되면서, 그가 당대의 톱스타로 등극할 날은 잠시 미뤄졌다.
여자가수의 경우에는 패티김이 전면에 등장해 <사월이 가면>, <초우>, <살짜기 옵서에>를 연달아 히트시켰고 이미자와 김상희, 현미도 여전히 크게 활약했다. 이미자는 <섬마을 선생님>과 <흑산도 아가씨>를, 김상희는 <대머리 총각>과 <경상도 청년>을, 현미는 <무작정 좋았어요>와 <애인>을 발표했다. 문주란이 <동숙의 노래>로 데뷔해 <타인들>까지 발표했고, 이시스터즈도 <울릉도 트위스트>, <목석같은 사나이>를 크게 히트시켰다. 극장쇼의 여왕 이금희는 <키다리 미스터 김>으로, 최양숙은 <황혼의 엘레지>, 송춘희도 <수덕사의 여승>으로 크게 사랑 받았다.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로 활동하던 시절 길옥윤과 패티김의 다정한 모습.

압도적 가창력 지닌 대형가수 ‘패티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세계를 뒤흔들었을 ‘대형 가수’ 패티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국악원에서 전통 음악과 남도창을 배웠고 소프라노 김천애에게 성악을 사사했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장르의 한계를 초월한다.
1958년 미8군쇼 무대에서 데뷔한 후 1963년 미국에 진출하기도 했던 패티김의 신화는 1960년대와 함께 시작된 TV 시대에 이르러 활짝 개화한다. 1966년  동양방송(TBC)은 ‘패티김쇼’라는 고정 프로그램을 그녀에게 헌사했고, 사람들은 매혹적인 풍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보컬을 두루 갖춘 그녀에게 푹 빠졌다. 이 방송의 정규 멤버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길옥윤이었다.
패티김은 아마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프로포즈를 받은 가수일 것이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 밤, 충무로 대한극장 앞의 한 여관에 투숙했던 길옥윤은 뉴코리아호텔에 머물던 패티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4월이 오면 다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길옥윤은 전화에 대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랑/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라/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헤어지면은 애절도 해라.”
길옥윤이 전화로 들려준 <4월이 가면>은 달콤했다. 길옥윤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의 진심 어린 사랑이 담겨 있어서였을까? 패티김은 감동했고, 심야의 전화 데이트 이후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12월 10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당시 김종필 공화당의장의 주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패티김-길옥윤의 전성시대가 개막된다. 박춘석 곡 <초우>와 홍현걸 곡 <무정한 밤배> 외에,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가 된 길옥윤과의 히트곡 행진이 계속된다. <9월의 노래>, <빛과 그림자>, <뒷모습>,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하는 당신이>, <서울의 찬가>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1970년대 이후 이혼을 암시하는 히트곡 <이별> (1972), 이혼을 발표한 날 밤 길옥윤이 만들어 이듬해 동경음악제에서 동상을 차지한 <사랑은 영원히>가 발표됐다. 그리고 길옥윤과의 사이에서 보여준 오페라틱한 절창은 박춘석과 콤비를 이룬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시나무새>로 이어진다.
압도적인 성량과 극적인 표현력을 지닌 그녀의 목소리는 산업화를 향해 질주하던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사회의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패티김은 196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는 서구적 발라드의 선구자이며 동시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기도 하다.

 

▲하숙생 영화포스터.

최희준의 <하숙생>

 

60년대 대중가요계는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 주제가를 불러야 인기 가수가 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히트하면 영화로 제작하는 관행이 있었다. 엄청난 청취율을 기록한 드라마 <하숙생>도 정진우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1966년 개봉했다.
당시 아무 방송이나 틀면 흘러나왔던 <하숙생>은 철학을 전공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존재의 근원을 표현한 노래로도 통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가사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했고, 최희준의 구수한 창법이 매력을 더했다. 자신의 대표곡이 된 이 노래가 히트하면서, 최희준은 이 해 처음 생긴 제1회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에서 초대 최고인기가수상(가수왕)에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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