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광수ㆍ박정희와 신불출의 창씨개명
상태바
[시론] 이광수ㆍ박정희와 신불출의 창씨개명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9.25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민족은 부계 혈통에 따른 성씨(姓氏)를 유지해 왔다. 그것은 죽어서도 바뀌지 않는 관습이었다. 우리의 ‘성’ 제도에 반해 일본은 ‘씨(氏)’ 제도다. 씨는 개인이 아닌 집(家)에 붙여지는 표식과 같은 것이어서 호주 이하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같은 씨를 사용한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제 병합한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는 것을 오히려 금지했다. 한ㆍ일 민족의 차별화에 바탕을 둔 지배질서 유지를 통치목표로 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성명 개칭에 관한 건’을 시행했다. 그래서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혼동될 수 있는 성명을 호적에 올릴 수 없었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기조는 중일전쟁 때 급변한다. 전시동원체제에 조선인들을 군인으로 동원하기 위해 내선일체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제령 제19호)을 개정하여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한다.
창씨(創氏)란 씨(氏)를 바꾸는 게 아니고 일본식으로 ‘씨(氏)’를 새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개명이란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이 제도의 핵심은 조선인에게 ‘개명’이 아닌 일본식 성씨를 만드는 ‘창씨(創氏)’에 있었다. 창씨만 의무였고 개명은 자유였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해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창씨개명은 일제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자 내선일체의 하나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창씨개명이 전시동원체제의 하위개념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인적 자원이 더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조선 청년을 징집하기로 한 것이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 징집을 위한 술수였다. 
일제는 창씨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누가 보아도 창씨를 할 만한 사람 중에 일부를 골라 창씨를 하지 않도록 관리하거나 방임했다. 비행기를 헌납한 박흥식, 중추원 고문 한상룡, 내선일체 추진동맹 이사를 지낸 박춘금 등도 창씨를 하지 않은 대표적인 친일 부역자들이었다.
그런데 창씨 시행 3개월 동안 본격적인 캠페인을 벌였음에도 당시 조선인의 가구 수 약 400만호 중 불과 7.6%만이 창씨에 응했다. 같은 식민지 대만에서 일본식 창씨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창씨를 의무제가 아닌 허가제로 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조선인들의 혈통적 자부심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창씨개명 시행은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반발은 거셌다.  창씨의 강압 속에서도 이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많았다. 조선인이 호응하지 않자 일제는 조선인이 창씨를 안 할 경우, 각종 인ㆍ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여행을 불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결국 70% 정도의 조선인이 창씨 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교육열이 높은 조선인에게 자녀의 학교 재학을 불가능하게 만든 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 욕망과 사심 때문에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춘원 이광수는 일본의 시조 천황 진무가 즉위한 산의 이름 향구산에서 향산을 따고 일본의 남자 이름에서 많이 사용하는 랑 자를 써서 향산광랑(香山光郞)이라고 씨와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했다.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라고 창씨개명했다. 그런데 다카기(高木)에는 원래 성인 고령박씨의 흔적이, 마사오(正雄)에는 원래 이름 정희(正熙)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그래서 박정희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다시 창씨개명한다. 여기에는 조선인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 반해 억압받던 일제시대를 살면서 차라리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에서 ‘불출(不出)’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던, 사회 비판과 언어유희적 만담으로 유명했던 신불출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되자 "될대로 되어라"라는 의미의 추임새로 해석될 수 있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로 발음되도록 일본식 이름을 지어 시대를 풍자하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