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제일고 고 지산 김영무 선생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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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제일고 고 지산 김영무 선생 추모제
  • 신경호 기자
  • 승인 2011.04.1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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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고등학교 창립자인 지산 김영무 선생 추모제가 지난 6일 교내 묘소에서 열렸다.

70여년 전통의 제일고등학교(전신 순창농고) 창립자인 고 지산 김영무 선생 추모제가 한식일인 지난 6일 교내 충효탑이 자리한 선생의 묘소에서 치러졌다.

순창중ㆍ제일(여)고등학교 총동문회와 제일고등학교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제에는 동문회 임원 및 내ㆍ외빈과 재학생, 교직원 등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올해로 6회째 치러진 이번 추모제에는 황의옥 총동문회장, 임성래 서울지역 동문회장, 김명수 순창지역 동문회장, 김대유 전 총동문회장 등 동문회 원들과 유현상 교육장ㆍ조동환 전 교육장 등 교육계 인사, 김기곤 문화원장ㆍ임예민ㆍ이기자 군 의원 등 모교 출신 인사들이 참석했다.

추모제는 식순에 따라 한식제, 제례시언, 강신제배, 초헌, 고축, 아헌, 종헌, 헌다, 사신, 철상, 제례종언 순의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선생의 생전 업적을 기리는 한편,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교육이 지름길이다”는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마음에 새기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황의옥 총동문회장은 “중등교육기관이 거의 없던 당시, 지산선생이 순창지역에 학교를 설립한 것은 하나의 획을 긋는 역사이자 가난한 두메산골의 큰 축복이었다”고 회고하며 “민족주의적인 인재 양성에 한평생을 보낸 선생의 일대기를 본받아 모교출신 동문회원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하나로 뭉쳐 선생의 뜻을 이어가자”고 강조했다.

한편 일제의 수탈과 해방, 민족의 분단과 상쟁이라는 뼈아픈 고통과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변모를 거듭하며 지역의 애환을 같이해온 제일고등학교(교장 박일범)는 1942년 농업과 1학급 55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순창공립농업학교에서 시작, 올해 65회 10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인재양성 고등교육기관이다.

■ 순창농고 설립자 고 지산 김영무 선생은

지산 김영무(芝山 金英武ㆍ1891~1953·쌍치면 금성 출신) 선생은 “사고와 생활은 올바른 가치기준 속에서 행할 것이며, 행동은 폭 넓고 따스하게 이웃을 포용하면서 크게 하라 (거정행화 居正行和)”는 건학이념아래 “민족지도자를 길러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공립학교를 세운 순창의 선각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외세의 침탈 속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 지도자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 지산선생은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로와 함께 메이지대학에서 신학문을 수학했으며 민족주의적인 인재 양성에 한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쌍치 피노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지산 김영무 선생은 본관이 김해(金海)로, 1891년(고종 28년) 쌍치면 금성리(당시 피노리)에서 광양군수를 역임한 김우근(金宇根)씨와 모친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3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이후 농업전수학교(현 전주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신문학을 수업하였다.

1914년 담양의 고하 송진우, 고창의 인촌 김성수, 순창 복흥의 가인 김병노 등과 일본에 유학, 인촌ㆍ가인선생 등과 함께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지산선생은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당시 고하는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모두 호남의 인걸들로 상실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문학을 배워 힘을 길러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일본유학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부모들이 일본행을 허락하지 않자 몰래 집을 빠져나와 부산에 도착,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부모를 설득하여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판사, 민족자본기업 설립ㆍ운영
지산선생은 졸업 후 귀국하여 전남 순천재판소 판사를 역임하였으며 이후 민족자본의 형성과 인재양성에 전력하였다. 1920년 인촌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창건하려 하자 이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 설립에도 동참,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28년에는 무송 현준호와 함께 민족자본 육성의 일환으로 호남은행을 설립하였으며, 인촌 김성수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경성방직에도 자본을 투자하고 중역으로서 회사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1930년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와 공화자동차운수주식회사(현 전북여객)를 설립하여 취체역(현 전무이사)을 역임하였으며, 1935년에는 경남철도주식회사와 천안~온양간 사설 철도회사 취체역을 역임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지물공업주식회사와 순창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하였다.

신간회 활동,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편 지산선생은 애국운동과 신진개화운동의 선도역할을 담당하였던 신간회 순창지회의 총무를 맡아 보았으며,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과 국내 독립운동 지사들에게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호남출신의 고학생들에게도 학비를 대주어 호남출신의 많은 고학생들이 지산선생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지산선생은 이처럼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으며 인재양성에도 많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순창농업학교 설립
그의 이런 업적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순창농업학교의 설립이라 할 수 있다. 이 고장에 고등학교가 세워지는 것은 군민들의 오랜 숙원이었으며 선생 또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며 학교설립의 뜻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38년부터 학교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 당시의 거금 50만원을 기탁하여 1942년에 마침내 5년제 갑종 순창농업학교를 창립하였다. 지산선생은 막대한 재산을 민족교육에 희사하여 날로 더해가는 일제의 수탈과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해방후 은둔, 겸허한 일기 63세 마감
선생은 국권을 상실한 불운한 시기를 맞아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자본의 육성과 민족교육에 지대한 업적을 쌓았으면서도 무척 겸허한 인품의 소지자였다. 해방 후 어느 해 졸업식에서인가 식순에 ‘창립주 축사’라는 순서가 들어있었는데, 선생이 단상에 올라 “여기 창립주라고 한 것은 옳지 않으니 ‘창립 협조자’ 정도가 좋겠다”고 지적한 것은 겸허한 인품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광복 후 각계의 요청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평소의 후덕함과 따뜻함으로 6.25동란 하에서도 큰 어려움을 격지 않았다. 수복 후 전주에 있다가 1953년 5월 30일에 6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선생은 유언으로 번잡한 장례를 피하고 유해를 화장하여 학교(당시 순창농업학교)가 보이는 금산(錦山)의 공동묘지에 묻어 줄 것을 희망하였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금산으로 모셨다가 향토민과 동문들의 간곡한 희망으로 1968년 학교(현 제일고등학교) 내로 모셔졌다.

자료제공 : 순창제일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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