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의 ‘세시봉’에 얽힌 추억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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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의 ‘세시봉’에 얽힌 추억요즘
  • 오용호 독자
  • 승인 2011.04.2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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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호(57·순창읍 순화)

요즘 ‘세시봉’으로 통칭되는 70년대 음악이 부활하고 있는 것 같다.

송창식ㆍ윤형주ㆍ김세환의 여전한 모습이, 쉽고 정감은 있으되 가볍지 않은 음악적 품격이 텔레비전 화면에 넘친다. 어느새 70년대 학창시절과 학교를 졸업한 후 디스크자키(DJ)가 있는 음악다방을 찾아 리퀘스트 페이퍼(음악신청용지)에 좋아하는 음악을 적어내며 서너 시간을 보냈던(개겼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의 노래에서 가장 높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가사의 함축적 의미와 시적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70연대 한대수의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등에서의 절절한 의식, 양희은의 ‘아침이슬’, 김민기의 ‘새벽길’의 가사 “어느 초라한 길목엔 버려진 달빛 고였나…”에서 느낄 수 있는 기막힌 언어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히 절묘하고 의미심장하다. 이런 노래들과 호흡하지 않았다면 당시의 숨 막힌 시대를 온전하게 살 수 있었을까.

서울 무교동의 세시봉, 명동의 마이하우스, 쉘부르 소공동의 라스베가스 충무로의 닐바나 등 당시 통기타 가수들의 대표적인 활동 무대를 쉽게 찾아 갈 수 없었던 우리 촌놈(?)들은 광주문화방송에서 진행하는 ‘오후의 리퀘스트’ 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 살았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깊은 밤, 잠 못 이루며 마음속의 친구를 찾아 위로 받았던 포크가수들의 정감있고 의미심장한 노래와 함께 쏠, 사이키델릭을 표방하는 밴드들의 음악에 심취했던 그 시절은 지금 생각하도 참 행복했었다. 거기다 마음 속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나 학창시절 호감 가졌던 여자동창과 맥주 한잔 나누면 더욱 더.

돌이켜보면 한쪽에선 남진ㆍ나훈아ㆍ배호의 트로트가 당시의 화려한 무대를 장식했었고, 다른 한편의 무대에서는 송창식ㆍ이장희가 노래를 불렀다. “음악의 생산과 소비가 칼로 자르듯 구분되지 않았다. 시대의 문화를 함께 만들고 모두가 향유하는 분위기였다”는 한 논객의 진단처럼 우리 세대와 선배 세대들이 느끼고 즐긴 기쁨이자 좋은 추억이다.

‘세시봉’이 중ㆍ장년을 넘어 요즘 세대 젊은이들의 감수성까지 건드렸다면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지금 음악이 학원 교습식으로 훈련받은 아이들이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엇비슷한 반복적인 동작과 노래를 무대에서 재현하는 형식이라면 재능이 뛰어 난 대중예술인이라기 보다는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과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시봉’은 일시적인 복고풍조가 아닌 우리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 세대들의 자성이 아닐까.

그 시절 순창우체국 골목 ‘조약돌’에서 당시 젊은 주인아저씨의 힐난에도 아랑 곳 않고 ‘디스크자키’을 흉내 내며 낄낄됐던 20대 초반 청년이 60을 바라보는 장년이 됐다. 주먹보다도 더 컸던 고구마 다섯 개를 썰어야 ‘디스크’을 만져볼 수 있었던 그 시절,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매형인 튀김집 아저씨의 구수한 농담과 충고가 새삼 그립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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