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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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
  • 임양호 편집인
  • 승인 2011.05.0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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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우를 만나다 / ‘국민작곡가’ 임종수

▲ 고희를 맞은 임종수씨가 최근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 책을 출간했다.
콩쿠르대회 휩쓸던 순창군의 명까수

그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명까수 작곡가’, ‘히트곡 제조기’, ‘딩동댕 작곡가’에 이어 ‘국민가수’에 빗댄 ‘국민작곡가’까지. 그러나 어떤 수식어보다 그를 아는 군민의 기억 속에는 ‘순창군의 명까수’로 알려져 있다.

60년대 초 그가 군대에 가기도 전 가난한 시절의 시골 읍내에서는 철마다 ‘가요콩쿨대회’가 열렸었다. 요즘의 ‘전국노래자랑’이나 공개오디션 프로그램인 ‘위대한 탄생’에 비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시절의 문화공연행사였던 ‘콩쿠르’는 노래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행사였다. 당시 읍내 ‘순창극장’에서는 열린 ‘가요콩쿨대회’를 구경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노래 솜씨를 기억한다. 그 때를 기억하는 6-70대 주민들은 “노래라면 내가 일등이라고 자타가 인정했던 사람들도 임종수가 참가 신청했다는 소문이 나면 모두 나가기를 거릴 정도였다”며 “임종씨가 출전한 콩쿨대회에서는 금반지는 구경조차도 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당시 노래자랑에서는 최우수상의 상품이 금반지 1, 2돈 정도였다.)

유년시절부터 동내명물, ‘트로트 신동’
 

▲ 임종수 작곡가가 고희연에서 가족들과 함께 케잌을 자르고 있다. 왼쪽부터 아들 임지상, 형 임종염, 임종수, 누나 임길순, 딸 임지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유년시절을 “다섯살 글도 모르는 아이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외워 부르는 것은 물론 축음기 상태가 좋지 않아 중간에 늘어지는 가사까지 흉내 내는 동네의 명물(트로트신동)이었다”고 회상한다.

“1949년 순창초등학교 1학년 임종수는 소풍날 <무영탑사랑>을 불러 선생님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리 남성중 1학년시절에는 명국환의 <백마야 우지마라>를 불러 선생님들을 아연실색(啞然失色)케 했다.” 이렇듯 그의 가수를 향한 꿈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고 선천적인 재능도 있었지만 노력으로 이루려는 소망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 동네 사는 선배 한분이 ‘가수가 되려면 매운 것, 술, 담배 먹으면 안된다’고 한 말이 내 골수에 사무쳐서 군대 3년동안 술 한 잔, 담배 한 대 안피웠다.” 이런 자세가 그의 가수를 향한 꿈과 노력의 시작이었다.

고개든 가수의 꿈…낙방의 슬픔까지

가난했던 그는 이리 남성중을 졸업한 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전주 남문시장의 잡화상 점원을 거쳐 순창농촌지도소(당시 김팔만 소장) 급사로 일했다. 그는 그 무렵 처음으로 콩쿠르에 나가 당당히 1등을 차지해 받은 금반지를 아버지에게 드렸다고 기억한다. 가수가 되기 위해 상경을 결심했고 친구와 선배 도움을 받아 얻은 일자리가 신문배달이었다. 하지만 신문배달로 번 돈은 가수가 되기 위한 레슨비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8개월간의 신문배달 생활도 허사. 다시 전주로 돌아온 그는 이리 남성고 2부(야간)에 입학, 제1회 졸업생이 됐다.

그 무렵 국제레코드사 전속가수 오디션에 참가, 수백명 참가자중 열명이 뽑히는 결선에 안착했으나 초대가수 남백송의 노래를 듣고 “오늘 내가 합격한다해도 지금의 목소리와 실력으로는 가수되기란 택도 없겠다”는 충격을 받아 그길로 순창으로 내려와 귀래정(읍내 남산마을)에서 6개월 동안 발성연습을 했다는 그는 1962년 한국방송(KBS) 광주방송국과 전주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그 사이 부친이 작고했고 1963년 2월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 위생병으로 복무하던 그는 1964년 문화방송(MBC) ‘톱싱어대회’에 외출증을 끊어 참가했고 주간ㆍ월간대회를 거쳐 년말결선에 진출했으나 고배를 마신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황문평의 “보통은 가수들의 흉내를 내는데 이 군인은 자기스타일대로 부른다. 이런 신인이 앞으로 많이 배출돼야 가요계가 발전할 수 있다”는 심사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는 팝(POP)이 유행일 때라 우리 가요가 입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꿈에도 그리던 가수 접고 작곡가된 사연

군 제대 후 그는 작곡가 황문평을 찾아 ‘가수가 되고싶다’고 애원(?)하여 작곡가 계수남 문하에서 음악의 기초부터 다시 공부했다. 그때가 1965년 11월, 밤이면 철제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고 밥은 학원 옥상에서 석유풍로로 끓여먹었다. 그러나 그는 “가수가 되더라도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겠다”고 작심하고 남몰래 피아노 독학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 스물다섯. 피아노 강사를 거쳐 작곡가 나화랑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나화랑 선생에게서 <호반의 등불>, <항구의 인사> 두 곡을 받아 가수로 공식 데뷔했다. 꿈만 같은 가수 데뷔였다. 일주일 동안 그는 자신의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곤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내 노래를 취입해서 듣고 보니 음색에 개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당시는 팝송이 물밀듯이 들어올 때라 내 창법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도 않았다. 돈도 없으니 이 바닥에서 버틸 방법도 없었고 또 내 얼굴이 텔레비전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가수를 스스로 포기했다.”

60년대 중ㆍ후반에는 그보다 5-7년 선배인 최희준, 위키리, 현미 등 미8군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에 의해 흘러 들어온 팝, 재즈 스타일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왔지만 정작 세상에는 그와 같은 스타일의 가수가 설 무대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나화랑 선생을 찾아가 ‘가수를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나화랑 선생은 그에게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하면 너는 가수가 되고도 남는다”면서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너 오늘부터 작곡을 해라. 너는 반드시 작곡으로 성공한다”고 격려했다. 자신에 대한 냉철한 분석 끝에 결국 가수를 포기한 그는 스승 나화랑의 권유로 68년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에 들어간 그는 불멸의 곡들을 쏟아낸다.

히트곡 퍼레이드…‘국민작곡가’ 되다

<고향역>에 얽힌 사연 1970년 1월(당시 28세), 그는 서울에서 온갖 고생을 한 자신의 삶을 빗대 만든 곡 <창에 어린 모습>을 들고 3개월 동안 오아시스레코드사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나훈아가 모습을 드러내던 날. 그는 다짜고짜 “저 무명 작곡간데요. 나훈아씨에게 곡을 주고 싶어서 석 달을 기다렸어요. 딱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나훈아는 그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노래를 듣고 그 자리에서 감정을 실어 부르더니 “캬, 기찹니더, 선생님!”하면서 오히려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 5월초 나훈아가 취입한 <차창에 어린 모습>은 방송 불가 판정을 받는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가 퇴폐풍조 운운했기 때문이었다. 그후 1971년 12월말, 나훈아의 ‘멜로디가 좋아 아깝다. 슬픈 가사를 띠고 남녀노소 다 좋아할 수 있는 노래로 바꾸자’는 제안에 따라 중학시절 통학했던 기억을 떠올려 노랫말을 다시 쓰고 곡을 다듬어 탄생한 노래가 그를 일약 유명 작곡가 반열에 올려놓은 <고향역>이다.

<아내에게…>는 카바레 금지곡 그의 두 번째 히트곡은 하수영이 부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다. 음악학원 강사로 있던 27세 때 그는 6살 아래 제자를 아내로 맞이한다. 홍제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어 있던 아내를 보며 <이대로 영원히>라는 노래를 작사ㆍ작곡, 훗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의 원곡이 된다. 그는 “이 노래는 단순한 사부(思婦)곡이 아니다. 이 노래에는 8남매 중 막내로 자란 내가 ‘어머니와 아내’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과 가슴 시리도록 고마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있다”고 말한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나오면 남성들이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손님이 많아 클럽에선 금지곡이었지, 아마.”

<옥경이>, 원래는 나훈아 곡 1970년대 후반 조운파 작사가와 함께 들린 어느 맥주홀의 여종업원이 30여녀전 조운파 선생의 고향마을 소꿉동무. 작사가 조운파는 유행가보다 더 유행가 같은 이 사연을 <고향여자>라는 노랫말로 풀어낸다. 그는 여기에 곡을 붙여 나훈아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8년뒤 1989년 태진아에게 운명처럼 맡겨진다. 태진아의 부인 ‘옥형이’를 부르기 쉽게 바꾼 <옥경이>가 되어 빅히트를 친다.

어느 노랜들 사연이 없을까마는 그가 칠순을 맞아 펴낸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에는 작곡가, 작사가, 가수와 얽힌 사연들이 줄줄이 배어 있다.

고향에 노래비 세웠으면

그는 고향 순창에 대한 애정이 두텁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기억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고향에 대한 추억과 정겨움이 바탕이 되었다는 믿음 때문이다.

“‘고향역’은 명절 때면 항상 먼저 나오는 곡이 됐어. 순창군에서 몇 번인가 기념비를 세우려 논의를 했는데, 가사에 ‘순창’이 없다고 무산되었지. 섭섭함 이전에 순창 발전과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라도 아깝잖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임종수’ 이렇게 해 놓을 수도 있을텐데…”

일리가 있다. 자치단체 사이의 ‘원조다툼’이 치열하다. 장성군과 강릉시의 홍길동 다툼, 곡성군과 옹진군의 심청이 줄다리기 등등 관광 명소와 상품을 개발하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애창곡을 노래비로 세운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는 견해다.

그는 1980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방송(KBS) 전국노래자랑의 심사위원으로 지금은 KBS2 라디오 ‘이무송ㆍ임수민의 희망가요’ 심사위원으로 여전히 노래를 좋아하는 국민들의 동반자다. 그는 2008년 전국 최초로 신설된 충청대 음대 트로트가요학과 초빙교수이고 전국의 자치대학 또는 시민대학의 인기 있는 강사로 자신의 경험과 역경을 이겨내는 항심과 어른과 선배에 순종하는 예의를 강조한다.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키우며 대중가요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그는 “인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리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쉬지 않고 좋은 노래를 작곡하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히트곡> 고향역(나훈아ㆍ1972)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하수영ㆍ1976) 대동강편지(나훈아ㆍ1981) 옥경이(태진아ㆍ1989) 부초(박윤경ㆍ1990) 착한여자(인순이ㆍ1992) 남자라는 이유로(조항조ㆍ1997) 모르리ㆍ빈지게(남진ㆍ2002) 가져가ㆍ어머니(최진희ㆍ2002) 분교(나훈아ㆍ2002) 여정(최진희ㆍ2004) 사랑이 남아 있을 때(문희옥ㆍ2006) 사랑해 말도 못하는(이창용ㆍ2006) 당신께 넘어갔나봐(한서경ㆍ2006) 애가 타(장윤정ㆍ2008) 벤치(서주경ㆍ2009) 사랑하며 살 테요(남진ㆍ2010) 정말바보(후본ㆍ2010) 정녕(조항조ㆍ2010) 등 주옥같은 명곡들로 대중가요계를 이끌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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