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13)/ 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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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13)/ 실소
  • 선산곡
  • 승인 2019.10.0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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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소(失笑)

“어디야?”
옆 자리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인이 스마트폰에 대고 한 말이 들린다. 요즘 저런 스마트폰이면 위치 추적도 가능할 텐데 ‘너 지금 있는 곳, 어디냐?’를 직접 묻는 목소리가 칼칼하다. 내게 한 말도 아닌데 움찔, 의식에 날이 선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화를 받을 때 첫마디가 ‘어디야?’라는 말이 들리면 늘 거부감이 생긴다. 어느 지방에선 ‘어디고?’가 인사말이라지만 나에게는 과거의 흔적을 들추어지는 느낌 때문인지 그 어감이 썩 즐겁게 들리지는 않는 것이다.
가물에 콩 나듯이 통화를 하는 사이였다. 그의 전화를 받는 순간이면 첫마디가 ‘어디야’였다. 수년을 변함없이 그는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은 곧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암호이기도 했다. 모처럼 시간이 났다는 말이었고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들의 전화 통화는 유일하게 그 상황에서만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가 택한 시간이 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그의 요구에 따라 주어야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어디냐고 묻는 목소리가 늘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수동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내 상황이 위험한 노출이 될 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있었지만 청춘이 불길이 그걸 이기게 했던 시절이었다.
그 ‘어디야?’의 추억은 어둡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시절에 간신히 연결되었던 통화언어는 늘 짧아서 다행이었는지 몰랐다. 어디야를 묻는 상황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있는 줄 알면서 그렇게 묻는 정해진 언사가 싫었던 것이다. 어디야? 예전의 그가 묻는다. 대답은 퉁명스럽다. 어디면 뭐하게. 헛웃음 지어 속으로 하는 말이다.
버스를 탔다. 승강구 앞 1인석 앞자리에서 두 번째, 60대로 보이는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인 듯, 앞에 앉은 여자가 몸을 돌려 뒷자리여자와 대화를 나누는데 서로의 자식자랑이 늘어져 있었다. 앞자리여자는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며느리가 학교 선생님이며 혼수가 엄청났다는 자랑이었다. 그에 질세라 뒷자리 여자, 자기 아들이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지금 청와대에 근무한다는 응수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 통로 맞은편에서 앉아있던 나 말고도 다른 승객들까지 공해에 가까운 그 소리를 참고 들어야만 했다.
참다못한 운전기사님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 마디 했다. 여기 자식 못 여윈 사람도 있고 취직 못한 사람도 많으니 그만 좀 하시라는 정중한 요구였다. 내가 할 소리 대신해준 것 같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들 결혼에 며느리를 자랑하던 사람은 입을 다물고 돌아앉았는데 청와대 근무 자랑이 늘어졌던 사람이 가만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이 뭔데 승객들이 대화하는데 참견을 하느냐, 내 자식 자랑도 내 자유다. 당신은 운전이나 해라하는 대거리가 잠깐에 그치지 않았다.
세상을 살면서 직접 맞부딪치지 않은 제3자로서 받는 울화가 이런 메가톤급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대단하시면 청와대에서 자가용 한 대 하사받아 기사님 두고 외출하시지 왜 서민들이 애용하는 버스에서 1,300원 내고 갑질이냐고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기사가 어이없는지 입을 다물어버렸고 정류장 승객을 태우기 위해 때마침 차가 섰다. 목적지가 두 정거장이나 남았지만 나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리고 말았다. 더 이상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남 일에 한마디 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지만, 혹여 저런 청와대 빽에 맞섰다간 어디 뼈마디가 온전하겠나, 그냥 참고 넘어가자니 씁쓸한 생각이 앞설 뿐이었다. 겨우 ‘에잇!’하는 소리를 남기고 내렸던 오기가 부끄러운 세상. 역시 청와대 빽은 이런 데서도 빛나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 원 참 같잖아서. 속으로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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