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12) 1970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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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12) 1970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①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1.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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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12)

 

희망의 70년대가 밝았다. 7월에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되었고, 7월 25일 기점으로 서울 인구가 500만을 돌파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 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를 언급하며 새마을운동이 전개된다. 농촌환경 개선을 위한 새마을가꾸기사업은 1972년 ‘농촌새마을운동’으로 확장되어 시행된다. 그러나 기대 속에 출발한 1970년은 대형사건사고로 얼룩진 해였다. 3월 17일 집권세력의 도덕적 치부를 드러낸 ‘정인숙 살해사건’이 발생했고 4월 8일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 3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1월 13일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재단사인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사망했다.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대회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김대중은 첫 기자회견에서 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교류, 4대국 보장안 등을 제시해 돌풍을 일으키며 박정희의 최대 맞수로 떠오르게 된다.

1970년 인기가요 - <임은 먼 곳에>ㆍ<아씨>ㆍ<소양강 처녀>ㆍ<검은 고양이 네로>

여자가수들이 부른 트로트 계열의 노래로는 <아씨>ㆍ<여자 하숙생>(이미자), <서산 갯마을>ㆍ<바다가 육지라면>(조미미), <소양강 처녀>(김태희), <당신은 철새>ㆍ<일자상서>(김부자), <처녀 농군>(최정자) 등이 사랑을 받았다.
비트로트 계열의 노래로는 패티김의 <사랑이란 두 글자>와 <람디람디담>, 펄시스터즈의 <싫어>와 <슬퍼도 떠나주마>ㆍ<수탉 같은 여자>, 김추자의 <임은 먼 곳에>와 <빗속을 거닐며>가 크게 유행했다. <몰랐어요>(김상희), <그 사람 바보야>(정훈희), <범띠 가시내>(양미란), <마른 잎>(임아영), <봄비>ㆍ<꽃잎>(이정화)도 사랑을 받은 노래들이고, 문정선이 <파초의 꿈>으로, 이성애가 <사랑의 오두막집>으로 첫 이름을 알렸다. 번안곡 중에는 <검은 고양이 네로>(박혜령)와 <스잔나>(정훈희)가 크게 히트했고, 남녀 혼성듀엣인 뚜아에무아가 <약속>, <그리운 사람끼리>를 발표했다.
남자가수에서는 나훈아의 독주가 돋보였다. 나훈아는 <강촌에 살고 싶네>ㆍ<낙엽이 가는 길>ㆍ<바보 같은 사나이>ㆍ<너와 나의 고향>ㆍ<두 줄기 눈물>을 발표하며 가요계의 새로운 왕자로 떠올랐다. 월남에서 군복무 중이던 남진은 휴가 때 취입한 <사랑이 스쳐간 상처>, <철새>를 히트시켰으며,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 이상열의 <난이야>ㆍ<싸늘한 태양>, 배성의 <기적소리만>ㆍ<망향>, 박건의 <청포도 고향> 등 여전히 트로트가 위세를 보였다.
그러나  황규현의 <애원>, 한상일의 <애모의 노래>ㆍ<웨딩 드레스>,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ㆍ<바닷가의 추억>, 히식스의 <초원>ㆍ<초원의 사랑> 등 팝계열의 노래도 크게 사랑을 받았다. 신인가수 김상진(<이정표 없는 거리>)과 이현(<내 사랑 지금 어디>이 데뷔했다.

▲김추자 <님은 먼 곳에>

김추자와 <임은 먼 곳에>

1970년대 초 한국의 뭇 남성들은 김추자라는 대형가수에 열광했다. 그녀는 가창력ㆍ패션ㆍ무대 장악력 등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압도적이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생겨났고, 가요팬들은 ‘잠자던 돌부처도 불러 세웠다’는 김추자를 가요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가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노래에 몸의 언어를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김추자의 등장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전에도 최초의 댄스 여가수로 불린 <키다리 미스터 김>의 이금희가 있었고, 현란한 안무와 패션을 앞세운 펄시스터즈가 있었다. 미니스커트 쇼크를 선사한 윤복희도 등장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춤은 어디까지나 노래에 부가된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김추자에게선 노래와 춤을 분리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춤은 본능적인 표현이었다. 작곡가 신중현조차도 “김추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추자는 몸에서 노래가 나온다. 김추자의 춤은 ‘소리를 내기 위한 율동’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가창력이 취약한 80년대 이후 댄스 가수들과 비교해 보면 김추자의 압도적인 완성도와 카리스마를 알 수 있다. 생명력이 충만한 그녀의 가창력은 이미자와 패티김이 자리하고 있는 반열에 속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임은 먼 곳에>는 김추자를 일약 최고인기가수로 떠올린 출세곡이자,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신중현에게도 확고한 기반을 제공한 곡이다. 이 노래는 동양방송(TBC) 티브이(TV) 주말연속극 주제가로 신중현에게 위촉됐으며, 처음 취입하기로 내정된 가수는 당대 최고의 가수 패티김이었다. 하지만 주제가 취입제의를 받은 패티김은 ‘그런 리듬의 곡은 부르지 않겠다’며 녹음 날 자신의 리사이틀 무대에 출연하는 ‘과오’를 범했다. 패티김이 거부하고 떠난 뒤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김추자는 몇 시간 만에 이 노래를 녹음해 불후의 명곡으로 만든다.
김추자 이후로도 이 노래가 수록된 음반은 장현ㆍ조관우ㆍ장사익ㆍ거미 등 무수하다. 시대를 초월해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패티김도 뒤늦게 이 노래를 취입해 당시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애절한 70년대식 사랑의 정서를 담은 김추자의 <임은 먼 곳에>는 사랑의 열병에 빠진 무수한 젊은 남녀들의 영혼을 어루만진 불후의 명곡이다. 

▲박혜령 <검은 고양이 네로>

여섯 살 박혜령 <검은 고양이 네로>

당시 여섯 살의 박혜령이 앙증맞은 목소리로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원곡은 1969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유럽 동요콘테스트’에서 3위를 차지한 곡이다. 당시 5세의 여자 어린이 크리스티나 다베나가 불렀다. 원래 제목은 ‘검은 고양이가 갖고 싶었어(Volevo un gatto nero)’다.
그런데 박혜령이 부른 <검은 고양이 네로>는 이웃 일본에서 이탈리아 원곡을 편곡해 1년 전에 히트한 곡이었다. 당시 6세 남자아이인 미나카와 오사무(皆川おさむ)가 불러 인기를 끈 <검은 고양이 탱고(黒ネコのタンゴ)>를 들여와 손을 봤다. 당시 한국은 외국 대중문화의 거의 대부분을 일본을 통해 알아냈다. 바다 건너 부산에서 볼 수 있는 일본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이 노래를 접했을 듯하다. <검은 고양이 네로>는 이탈리아ㆍ일본ㆍ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히트곡으로 불렸다.

그룹 키보이스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는 그룹 키보이스가 1970년에 불러 히트한 곡으로, 1997년 디제이 디오시(DJ DOC)가 리메이크했다. 여름 노래로 사랑받으려면 일단 산뜻한 멜로디와 가사를 갖추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곡이 빠르고 신나야 했다. 이러한 요소를 모두 지닌 <해변으로 가요>는 지금도 여름 휴가철이면 전국 방방곡곡의 피서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원래 일본곡으로 우리말로 번역된 노래다. 1968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그룹사운드페스티벌에서 우리나라의 키보이스와 미국ㆍ일본ㆍ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그룹사운드팀들이 5일간 공연을 펼쳤다. 이들 가운데는 재일교포 이철을 포함한 8명의 일본 그룹사운드 ‘더 아스트로 제트’가 있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선 일본노래를 부를 수 없게 돼있었다. 리더 이철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작사ㆍ작곡한 <하마베에이꼬>(浜邊へ 行こう, 병변으로 가요)를 형(이건)에게 한국어 번역을 맡겼고, 형은 이를 다시 친분 있는 소설가 이호철에게 가사 번역을 부탁해 시민회관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키보이스가 이철에게 그 노래를 부르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허락 받았다. 그런 과정들을 거친 노래가 <해변으로 가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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