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빈 들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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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빈 들에 서서
  • 김효진 이장
  • 승인 2019.11.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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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풍산 두지마을 이장

오늘도 옥출산에 오른다. 몸과 마음이 너덜거려 단식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가리 들녘은 마치 역사적 유물로 고스란히 남은 과거의 흔적 같다. 머리에 ‘바리깡질’ 하듯 콤바인이 지나간 자국이 남은 논바닥은 고고학적 가치나 있을까, 어제 오늘 우리의 삶의 터전이 아닌 양 생경하고도 낯설다. 오래된 화석마냥 회색 물감으로 덧칠해 놓은 저 곳에서, 정말이지 올 봄에 모를 내고 뜨거운 여름날을 보내며 최근 추수 직전에 태풍에 휘청거렸나 싶다.  

며칠 전 도복 벼만 따로 정부에서 수매를 한다하여 공판장에 다녀왔다. 등급도 등급이지만, 가격을 얼마나 매길까 애가 탄다. 세 차례 태풍에 견디지 못하고 누워버린 나락뭉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듯 수확해야 하는 올 가을걷이는 유례가 없을 만큼 농민들을 힘들게 했다. 벼가 쓰러질까 비바람 소식에 밤잠을 설쳤을 수많은 농민들은 도복벼 수매현장에서 어떤 심정으로 검사원의 등급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등급도 매기기 전, 이웃 마을 이장 형님이 소주나 한잔 하자며 순풍식당으로 이끈다. 말머리에 욕을 달고 사는 형님은 오늘따라 내게도 짜증 섞인 말투다. 정부 수매가 생색내기용이라며 농민이 거지냐고, 애먼 내게 속풀이를 시작한다. 올해는 공공비축미 수매 물량이 대폭 줄어  생산량의 6% 정도만 정부에서 수매하는 것이라, 사실 수매랄 것도 없다. 예전 ‘전량수매’ 외치던 때는 그나마 정부에 대한 기대치라도 있었는데 말이다.
술자리 대화 주제가 어느덧 최근 정부의 ‘WTO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 포기’ 발표에 이르자, 옆 자리 어르신까지 합세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맞는지 열띤 토론장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경제 지표상으로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1인당 GDP가 3만 불이라는데, 공판장에서 소주잔이나 기울이는 우리 같은 화상들을 봐서는 영 피부에 와 닿지가 않아서 말이다. 농업분야야 개도국도 모자라 후진국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은데, 농업 때문에 우리나라가 개도국에 머무는 건가 싶어 도시 사람들은 영 탐탁치 않는 눈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작년 변동직불금은 왜 안 주냐’며 정부, 국회의원을 싸잡아 연방 도둑놈, 죽일 놈들 해댄다. 단식 뒤끝이라 술을 마실 수 없다보니, 형님 주사를 응대하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형님이 국회의원 놈들 상대로 고소라도 허시오!” 괜스레 화만 돋운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농민회에서 데모 세게 안한다고 늘 궁시렁대는 형님인데, 돌아서서 나오는 걸음에 결국 그 헛헛한 마음 제대로 받아주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고 만다.

옥출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하던 중 농로 변 들녘으로 시선이 닿았다. 헛바람 들까봐 가을 내내 들녘 추수를 하는 와중에도 논 주변 억새의 은빛 물결을 애써 외면했는데, 오늘은 마음가는대로 두고 싶어 그저 한참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청명하다 못해 시리다. 이맘때 즈음하여 서정주 시 ‘푸르른 날’을 송창식의 목소리로 들으면 사무치게 그리움이 밀려온다.
유난히 가을을 타는 탓에 예전엔 추수 끝나고 지인들과 어울려 노래방에서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노래 한 곡조라도 뽑을 만큼의 여유와 낭만이 있었건만, 이젠 가을이 오면 얼른 겨울이 오기를 기다린다. 꽁꽁 얼어버린 들판처럼 우리네 마음도, 세상 돌아가는 꼴도 영영 멈춰 서 버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인류가 지구가 둥글다는 인식에 도달하기 전까진 지평선 끝엔 낭떠러지가 있을 줄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놈의 청승맞은 헛된 관념의 끝엔 겨울이 계절과 인생 그리고 모든 만물의 변화무쌍한 운동의 마지막 계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허무한 세상, 갈아 엎어버리고 싶었다. 그 계절은 언제쯤 오는 걸까.
곧 비가 온다하니 쟁기질 하러 논으로 나가봐야겠다. 벼 그루터기에 새순 돋아난 게 마치 부질없고 덧없는 내 마음속 생각의 갈래들 같아서, 더욱이 갈아엎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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