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4) 부여는 어떤 나라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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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4) 부여는 어떤 나라였나?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2.1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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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강국, 목축중시, 여성처벌 엄격

예맥계 부여족(夫餘族)이 세운 나라 부여는 역사서를 보면 전성기때 인구 8만 호(약 40만 명)에 사방 2000리의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다. 당시 인구 3만 호에 불과한 초기 고구려보다 한때 국력이 훨씬 강했다.《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에는 이 나라가 “매우 부유하고 시조 때부터 남의 나라에 패해 본 일이 없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부여는 수준 높은 철제무기를 사용하고 군사 5만 이상을 동원할 수 있는 군사 강국이었다. 전체 인구 40만 명 중 5만 명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직업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전투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집집이 활과 칼, 창 등 병기를 마련해 두어 전쟁에 항상 대비했다.
수도였던 길림시 주변 동단산ㆍ모아산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과 유적에는 금제 귀걸이ㆍ황금 허리띠 장식ㆍ철제무기ㆍ철갑옷이 있는데, 지배층의 세력이 매우 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 한 무덤에서 부여인의 얼굴로 알려진 금동제 얼굴 모양 가면 한 쌍이 나왔다. 상투를 틀었고, 길고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부여 사람들은 농사를 주로 지으면서 목축을 겸했다. 부여 사람들이 목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높은 관리의 이름에 가축 이름을 따 붙인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부여의 가장 높은 관리는 네 명의 ‘가(加)’였는데 이름을 마가(말), 우가(소), 저가(돼지), 구가(개)라고 했다.
부여인들은 백색을 숭상하여 나라 안에서는 흰옷을 즐겨있었으며 상의와 겉옷ㆍ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귀족이나 관리들이 나라 밖을 나갈 때는 비단에 수를 놓은 옷을 입으며 모자와 허리띠에는 금과 은을 장식했다.
죄를 지으면 그 처벌이 엄격했다. 물건을 훔치면 그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했고, 만약 돈이 없을 때는 노비로 팔려갔다. 부여의 법은 여자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어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면 여자만 죽이고, 부인이 투기하는 것을 가장 질이 나쁜 죄로 취급하여 그런 여자는 죽여 시체를 산에다 놔두고 거두지 못하게 했다. 만약 여자 집에서 시체를 찾아가고자 할 때는 소와 말을 지급하여 데리고 갔다.

고구려와의 관계…친화보다 ‘적대’

부여는 대체로 중국왕조들과는 교류하며 우호적으로 지냈지만, 선비족 등 북방 유목민족이나 고구려하고는 세력을 다투면서 만주 지역 역사를 주도해 나갔다.
처음 부여와 고구려가 접촉하게 된 것은 고구려 추모왕(주몽) 14년(기원전24년)이었다. 가을에 부여에 살고 있던 고구려 추모왕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사망하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주고 사당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한 답례로 그해 10월에 토산물을 보냈다. 이처럼 금와왕이 살아있을 때 고구려와 부여는 적대관계가 아니었다.
금와왕이 죽고 대소왕이 왕위에 오르자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하였다. 왕자 시절부터 주몽에게 열등감이 심했던 대소왕은 고구려에 대한 부여의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 기원전 6년(고구려 유리왕 14) 5만 대군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서기 13년 11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학반령에서 고구려군의 기습에 허를 찔려 물러갔다. 21년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주몽의 손자)이 부여를 공격했다. 부여 대소왕은 고구려 괴유라는 장수에게 목이 잘리게 된다.
121년 고구려 태조왕이 부여를 방문해 유화부인의 사당에 참배하고 부여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물품을 나누어주었다. 이 행동에 대해 부여인들은 고구려 태조왕에게 고마워했겠지만, 부여왕은 고구려왕이 부여까지 와서 왕 노릇을 한 것에 대해 심기가 몹시 상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고구려에 대한 외교 노선은 완전히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346년 부여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 때 국왕과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마침내 494년(고구려 문자왕 3)에 소멸하여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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