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19)/ 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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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19)/ 치열
  • 선산곡
  • 승인 2020.01.0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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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熾烈)

1년 전에 읽은 책이 있다. 방대한 대하소설이었다. 읽은 뒤 세로쓰기로 된 책만 과감하게 버렸다. 언제 이 책을 다시 펼치겠나하는 생각에서였다. 우연히 들른 중고서점에서 가로쓰기로 된 그 책을 다시 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새로 산 헌 책’. 총 5부 중 1부부터 3부까지 9권. 9권을 버렸지만 새로 사들인 9권의 책으로 남아있는 4, 5부와의 전집 아퀴는 다시 맞게 되었다.
그 책을 다시 읽고 있다. 다시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 없이 시작했지만 분명히 이유 있는 길로 가고 있다. 1년 전에 읽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새로운 의식 때문에 벗어날 수가 없다. 이번에 읽는다면 세 번째 독파다. 아마 네 번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미 작고한 그 작가의 소설은 다 읽은 것 같지만 또한 다 기억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소년기의 습작부터 지금까지 내 알량한 필력에 영향을 주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낡은 상자에서 빛바랜 동인지 한 권을 발견했다. 고등학생 시절 철필로 긁어 인쇄한 등사본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 몇이 모여 엮은 창간호 제목은 <가로등(街路燈)>이었고 2, 3호는 <석록(石綠)>이었다. 그중 3호였으니 통권 마지막 호인 셈이다. 여는 글에 해당하는 ‘계절의 찬가’가 있고 가을 호를 알리는 ‘계절의 시’는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를 실었다. 빨치산 시인으로 알려진 김웅 선생의 축시가 실려 있었다. 옥천동 그분이 살던 집을 찾아가 격려 축시 한 편을 써주십시오, 했던 가을밤이 생각난다. 제목은 ‘돌에 파란 잎 돋아나면’이었다.

아비규환과 신음소리가 녹음된
암벽을 부시고 들어가야 한다
……
돌을 갈아 거울을 보던 많은 조상들이
판석(板石) 되어 쌓아 올린 석탑(石塔)의 층계

그 시를 다시 읽으며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다. 석탑의 층계처럼 쌓아 올릴 수 없는 헛된 짓이었다는 자괴였을까. 누군가 손 내밀어 주지 않았다는 원망을 나는 한때 지우지 않고 살았다. 시인의 마음엔 다가갈 수 없었겠지만, 그 ‘슬픈 고독’이 지금의 내게 거울처럼 보인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 밤새워 철필을 긁었고 등사를 했다. 등사 기구를 선물해 준 형님 덕분에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었다. 조잡하지만 그 동인지는 지금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혹 친구 중 하나라도 지니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뜻밖에도 내가 쓴 <강물>이라는 소설이 게재되어 있었다. 새삼스런 발견이었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글이었지만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남의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 의식의 성향(性向)이 그때 드러났다는 것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이제 길이 다른 글 때문에 읽고 쓰는 자세가 치열(熾烈)함이 되었다. 치열. 한때 가장 쓰기 싫어했던 말이었다. 이젠 나의 경망(輕妄)을 다스려 주는 경구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치열한 걸음을 어떻게 띠어야 할까. 슬픈 희망이지만 걸음은 계속 걸어야 한다. 새해엔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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