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5) 충절의 대명사, 두문동 선비 임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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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5) 충절의 대명사, 두문동 선비 임선미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1.1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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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미의 절의를 추모하여 배향한 인계면 호계마을의 호계사.

개혁 정치를 펼치던 공민왕 사후, 고려 말기는 공적인 정치체제가 거의 붕괴한 상태였다. 왕조는 유지되고 있었으나 백성들의 기본적인 생존을 전혀 보장하지 못했다. 권문세가는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했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할 만큼 광대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하는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극한적인 상황에 내몰렸다.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왜구는 충정왕 2년(1350) 이래 고려말까지 전국을 짓밟으며 고려의 존망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달았다. 성리학적 이념을 숭상하던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의 비참한 현실에 가슴을 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 세력의 분열과 조선 건국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위화도회군 이후 우왕을 폐위하고, 1389(창왕1)년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공포한다. 고려 말의 전제 개혁은 한국 역사 초유의 조치로 1949년 남한의 농지개혁과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에 비견할 만큼 파격적인 개혁이었다.
신진사대부들은 전제 개혁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안정과 국방체제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 결과 왜구에 대한 방어력이 대폭 증강됐다. 40여년에 걸쳐 고려를 유린했던 왜구 문제가 이 시대에 와서 거의 해결된다. 1389년 2월 경상도 원수 박위(朴葳)는 대마도를 정벌했다. 왜구의 본거지를 공격한 것이다.
신진사대부들은 우왕 때까지만 해도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를 가르지 않고 모두 고려사회의 문제점을 고쳐나가야 한다는 데 뜻을 함께했다. 하지만 창왕을 옹립한 이후 이 두 계파 사이에 개혁노선 차이가 발생한다.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체제 내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던 온건개혁파는 역성혁명파와 이성계 세력의 신왕조 개창 의지가 드러나자 서로 결별하게 된다. 특히 정몽주 피살 이후 온건개혁파와 많은 젊은 선비들은 새 왕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고 고려왕조를 향한 변함없는 충절을 유지한다.

두문동 사건

두문불출(杜門不出)은 본래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에 나오는 고사성어지만 두문동(杜門) 72현 덕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말로 떠올랐다. ‘문을 걸어 잠근 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은, 불사이군을 외치던 다수의 고려 충신들이 이성계의 명령을 거부한 채 조선의 세상과 인연을 끊은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
이성계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 있는 선비들을 회유하기 위해 개경 경덕궁에서 친히 과거시험을 열었다. 하지만 개경의 젊은 선비들은 대부분 응시하지 않았다. 선비들은 경덕궁 앞 고개에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 후 고개는 부조현(不朝峴, 왕에게 알현하지 아니하고 넘어간 고개 즉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조현 북쪽의 관을 걸어놓은 곳도 괘관현(掛冠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선비들은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에 묻혀 살았다. 마을은 두문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조정에서는 두문동을 포위한 채 밖으로 나오라고 강요했지만, 선비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놓게 했고, 그 불길에 모든 이들이 물러설 줄 알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 그리고 맹(孟)씨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무너진 고려와 운명을 함께했다.
두문동 선비들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공식 언급된 것은 그들이 두문동에서 순절한 지 360여년이 지난 1740년(영조 16) 9월 1일이다. 영조가 개경에서 출발해 가마를 타고 제릉으로 가면서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서 “고려의 충신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는 칠언시를 내리면서 두문동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 이후 영조 16년(1751년) 10월 21일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첫 제사를 지낼 때 낭독했던 사제문(賜祭文)에 “오직 임씨(林氏), 조씨(曺氏), 맹씨(孟氏) 성을 가진 세 사람만 전하고, 나머지는 찾아볼 기록이 없네”라고 했는데 이때 임씨가 임선미다. 그 후 정조 7년(1783년)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임선미 가계와 순창임씨

두문동 72현의 주역 임선미(林先味ㆍ1362~1394)는 충숙왕 5년 정축(丁丑)생이다. 성석린(成石璘ㆍ1338~1423), 박상충(朴尙衷ㆍ1332~1375) 등과 교우한 것으로 보아 그의 출생을 1337년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자는 양대(養大)요 호는 두문제(杜門齊) 또는 휴암(休庵)이다.
임선미의 세계(世系)는 임팔급(林八汲)을 시조로 하여 고려 의종 때 좌의정에 오른 문정공 광비(光匪)의 8세손이며, 가전체 <국순전>을 저술한 대문장가 춘(椿)의 7세손으로 순창임씨 파시조인 임중연(林仲沇)의 아들이다. 임중연은 충숙왕 때 우상시ㆍ밀직부사ㆍ첨의찬성사가 되어 순창군(淳昌君)에 봉해졌다.
임선미는 타고난 기질이 굳세면서도 겸손한 덕성을 지녔고, 경애사상이 투철했다고 한다. 공민왕조에 태학생(이후 태학사)이었는데 사람들이 백일 탈상하는 풍습을 보고 정몽주ㆍ박상충 등과 함께 3년상을 권장하는 등 퇴폐한 예법을 바로잡기에 힘써 그 명망이 세상을 움직였다고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묘는 두문동 후록증봉하(后麓甑峯下)에 있다.
임선미는 슬하에 용배(用培)ㆍ용달(用達)ㆍ용계(用烓) 3형제를 두었다. 두문동 참사가 있은 후 첫째 용배와 셋째 용계는 순창으로 내려왔고, 둘째 용달은 개성에 남았다. 두 아들이 순창으로 내려온 것은 할아버지 임중연이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고려 충숙왕을 보필한 공로로 순창군(淳昌君)에 봉군된 인연 때문이다. 훗날 용배의 장손 치지(致之)는 화순 오씨(吳氏)와 혼인해 화순에 세거지를 이뤘고, 순창은 둘째 향(香)의 손이 주로 세거를 이루고 있다. 임선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순창군 임중연을 파시조로 삼아 독자적으로 순창임씨를 표방했으나, 임선미 후손이라는 게 불리하게 작용해 원시조에 맞춰 평택 본관을 쓰며 살기도 했다.

두문동 절의의 의의

성리학은 현실과 괴리된 공리공론(空理空論)이며, 조선왕조 멸망 원인을 논할 때면 십중팔구 거론되는 등 부정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초의 성리학이야말로 당대의 역사적 위기에 대한 진정한 실천적 응답이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던 공자의 말처럼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은 새로운 세계의 실현을 위해 기꺼이 순교자가 되고자 했다. 이런 신념을 가장 먼저 몸으로 입증한 사람이 정몽주였고, 뒤이어 임선미를 비롯한 두문동 선비들이 합류했다.
임선미와 두문동 선비들은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충절과 명분의 가치를 믿는 선비들이었고, 그 가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역정을 통해 진리는 ‘법칙’이 아니라 ‘행동’과 ‘투신’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진리가 이 땅 위에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일상의 진리를 확신하고 입증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에선 조선 창업에 반대하다 수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의 정신적ㆍ정치적 모범으로서 불멸의 생명을 부여받으며 역사의 상징으로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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