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7) 성운선 명창과 장영찬 명창
상태바
순창인물(27) 성운선 명창과 장영찬 명창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2.20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리는 동편제나 서편제, 중고제의 전승양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처음에는 전승지역에 뿌리를 두고 발전해 갔다. 그러나 명창이 사정에 따라 이사해서 사는 지역이 바뀌기도 하고, 제자들이 이사한 명창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가문을 중심으로 유파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순창 출신 소리꾼들 중 서편제의 창시자 박유전의 소리는 보성소리로 계승되었으며, 장재백의 소리는 송흥록ㆍ송광록 이후 남원판소리 중흥에 크게 기여하며 남원소리로 전승되었다. 또 장판개 집안의 소리는 동생 장도순과 장도순의 딸 장월중선, 장월중선의 딸 정순임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순창인물은 장자백의 외종 증손녀인 성운선 명창과 장판개의 둘째 아들인 장영찬 명창이다.
▲성운선 명창. 최동현 군산대국문과 교수 제공.

 

성운선 명창, 장자백 외종 증손녀

성운선(成雲仙ㆍ1927~1998) 명창은 복흥면 하리에서 아버지 성봉기와 어머니 장봉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성점옥(成點玉)이다. 성운선은 세습 예인 집안 출신으로 적성면 운림리 매미터 출신 장재백(張在伯ㆍ1849∼1906) 명창의 외종 증손녀다. 장재백의 질녀(동생의 딸) 장주이는 구례 출신 유성준 명창의 처이고, 유성준의 누이 유준은 남원 출신 김정문 명창의 어머니다. 성운선의 어머니 장봉임과 김정문 명창의 처 장봉선은 모두 장재백의 막내 동생인 장봉순의 손녀다(장봉임이 장봉선의 언니). 
성운선은 장판개와도 인연이 깊다. 13세 때 장판개(1885~1937)가 배설향과 함께 군산권번 소리선생으로 와 있을 때 동편제 <흥부가>와 <춘향가>를 배웠다. 27세 때도 인계면 마흘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장판개에게 <흥부가> ‘제비노정기’를 직접 전수받았다.
15세 때 정읍에서 이기권에게 <심청가>와 <춘향가>를 학습했고, 18세에 정읍명창대회에서 3등상을 수상했다. 20세 때 담양에 사는 이창권 춤 선생에게 승무ㆍ검무ㆍ살풀이 춤 등을 배웠고, 23세에 전주 명창대회 2등상을 수상했다.  35세 때는 김연수에게 <춘향가>와 <수궁가>를 사사 받았다. 

장판개 바디 <흥보가> 전승자

그녀의 소리는 남자 소리 같이 성음의 높낮이가 분명하고 우조를 많이 쓴다. 무사태평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유만만한 창법으로 ‘만조창(漫調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장판개에게 <흥보가>를 배웠기에, 그녀가 부른 <흥보가>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장판개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성운선은 장판개 바디 <흥보가>의 유일한 전승자였다. 그중에서도 ‘제비노정기’와 ‘비단타령’을 잘 불렀다. 성운선의 <심청가>는 최고의 여류 명창 중 한 명이었던 박초월의 소리에 견주어도 별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춤 또한 소리와 함께 장단 속에서 추는 춤이어서 무용가의 뺨을 때릴 정도로 살풀이춤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군산판소리 대모

1948년 군산국악연구회가 설립된 이후 군산국악원 강사로 재직하고, 이후 사설 국악원을 운영해 군산지역 판소리 전승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69년에는 한국국악협회 전북지부장을 역임했고, 1983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제2호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성운선은 수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중견 소리꾼들인 김금희ㆍ임화영ㆍ나윤영ㆍ김학용 등이 대표적이다. 성운선은 서편제 소리의 대가였던 이날치의 손녀인 이일주의 성장과도 인연이 깊다. 성운선은 이일주를 초청해 소리를 들어보고 오정숙에게 소리를 배울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김소희와 박초월에게 소리를 배웠던 이일주는 이후 오정숙에게 <심청가>와<춘향가>를 배우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성운선은 군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1998년 작고했다. 2017년 7월 남원시 운봉읍에 위치한 국악의 성지에 안치되었다. 

장영찬 명창, 장판개 아들

장영찬(張永贊ㆍ1930∼1976)은 금과면 연화마을에서 장판개 명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영찬 집안은 유서 깊은 국악 집안이다. 장영찬의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국악 명인이었으며 아버지 장판개는 동편제의 거장이다. 장월중선 명창과는 사촌지간이다.
장영찬이 9세 되던 해, 아버지 장판개가 죽었기 때문에 장영찬은 아버지의 소리를 잇지 못하고, 14세 때 임방울에게 2년간 <수궁가>를 배웠다. 장영찬의 소리를 장판개의 녹음과 비교해 들어보면 목구성이 많이 닮았다. 장판개가 일찍 작고하지만 않았어도 장판개의 뼈대 있는 동편제 소리가 아들 장영찬에게 고스란히 전승되었을 것인데 안타깝다.
장영찬은 1946년 창극단 국극사에 입단해 <선화공주>의 남주인공역을 훌륭히 해내어 이름을 떨쳤고, 1952년 창극단 국악사에 입단해 창극반주 악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7년 보성 출신 정응민 문하에 들어가 2년간 판소리 <심청가>ㆍ<수궁가>ㆍ<춘향가>ㆍ<적벽가>를 배웠다. 

▲장영찬 명창.

 

창극 스타

장영찬은 1962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약 10년간 주연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1968년에 국악협회 주최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해 20세 가량 연상인 김준섭(정응민의 수제자)과 실력을 겨루어 판소리 부문 대통령상을 받아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1965년 상경해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창극공연에 참가했다.
그의 성음은 수리성(후천적으로 닦은 목소리)으로 기량이 뛰어났다. 판소리 여러 바탕에 두루 능했으나, 특히 <춘향가>를 잘 불렀다.그러나 한참 명성을 날릴 무렵(1970년경) 병을 앓기 시작해 녹음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다. 장영찬이 판소리 독창으로 남긴 음반은 없고, 다만 1971년에 릴테입으로 남긴 <심청가>와 <흥보가>의 일부 녹음(고수 김명환)이 있을 뿐이다. 장영찬은 창극 음반 두 가지를 남겼다. 장영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8년에 녹음된 지구레코드의 <창극 춘향전> 음반에 담긴 장영찬의 녹음을 들어보면 그의 <춘향가>는 정응민의 바디가 주를 이루고 거기에 김여란과 김연수의 소리제도 일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영찬은 성희경과 1940년대 후반에 창극 단체에서 만나 1953년에 혼인했고,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1970년대 최고의 인기 명창이었던 안향련을 비롯해 김동애ㆍ김일구 등 여러 명창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중견 소리꾼 유수정은 열 서너 살 무렵 명동 국립극장에서 장영찬 주연 창극 <춘향전>을 본 이후로 소리의 세계에 푹 빠져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영찬은 12년간 당뇨병을 앓다가 1972년 3월 21일(음력) 새벽 1시 서울 명륜동에서 사망했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옥과에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