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31) 조선시대 군수①-김정ㆍ서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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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31) 조선시대 군수①-김정ㆍ서유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4.1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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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목민관(牧民官ㆍ고을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수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과 본질에서 같았다. 자칫 일 처리가 어긋나면 모든 피해는 백성에게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목민관은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말했다. 조선 시대 전라도에서 순창의 위상은 종4품의 현령이 다스리는 상당한 위치에 속하는 고을이었다. 상피제도(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는 어떤 지방에 파견되지 못하는 제도)에 따라 타지역 출신 여러 관리가 순창군수로 재직했다. 조선시대 순창군수 중 순창군과 우리 역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김정(金淨), 삼인대에서 폐비 신씨 복위 주장

김정(金淨ㆍ1486~1521)은 1486년(성종 17) 충청남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효정(金孝貞)이며 호조정랑을 지냈다. 중종반정(中宗反正ㆍ1506)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직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ㆍ병조 좌랑ㆍ병조 정랑ㆍ이조 정랑 등을 거쳐 1514년(중종 9)에 순창군수로 부임했다. 
당시 조정은 박원종ㆍ성희안ㆍ류순정 등 핵심 반정세력과 그들이 임명한 정국공신(靖國功臣) 117명에 의해 장악되었다. 반정세력은 중종의 비 신씨의 아버지인 좌의정 신수근이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왕비 신씨를 폐비시켰다. 중종(中宗)은 반정공신세력에게 좌지우지되어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왕비 신씨를 폐위할 만큼 무기력했다. 1515년(중종 10), 김정이 순창군수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왕자(훗날의 인종)을 낳다가 산증으로 사망했다. 이때 일부 조정 대신들은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숙의 박씨를 천거했다. 
김정은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과 함께 중종이 왕비 신씨(愼氏)를 폐출한 것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순창 강천산에 모여 나무에 관인(官印)을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도 올렸다.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세 사람의 관인을 나무에 걸었다 하여 삼인대(三印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종이 보위에 오른 지 10년, 조광조와 김정 등 개혁 사대부들의 등장은 교착된 정국에 변화를 알렸다. 이들은 삼사(三司ㆍ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를 중심으로 조선왕조의 통치철학과 국가 운영의 기본원리를 되묻는 본질적이고 급진적인 각종 개혁안을 기획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공신 세력들이 반격을 꾀하자 중종이 조광조에 대한 지지를 거두며 기묘사화(1519)가 일어났다. 결국, 김정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기묘사화 때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ㆍ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1521) 때 나이 36세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김정 등이 모여 상소를 올린 것을 기념한 팔덕면 청계리의 삼인대(三印臺)에 1744년(영조 20) 4월, 비(碑)가 세워졌다. 김정 등 3인의 상소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1740년(영조 16)에 신씨를 복위하여 단경왕후(端敬王后)에 추증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순창 삼인대(三印臺)는 대의를 지키려는 이들의 선비 정신과 충절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이를 기리고자 1744년(영조 20)에 홍여통(洪汝通)ㆍ윤행겸(尹行謙) 등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삼인대비를 세웠다. 삼인대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이다.

서유구(徐有榘), 《임원경제지》 저술한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徐有榘ㆍ1764~1845)는 한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동농서》를 지은 이조판서 서호수(徐浩修)이다. 1790년(정조 14) 문과 급제 이후 외직으로 군수ㆍ관찰사를 거쳤고, 내직으로는 부제학ㆍ이조판서ㆍ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1845년(헌종 11)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유구는 35세 때인 1797(정조 21)년, 순창군수로 부임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농서(農書)와 농정(農政)에 대해 각 수령의 의견을 묻는 교지를 내렸다. 그는 백성에게 한두 번 죽을 먹이거나 곡식을 빌려주는 대신 농업을 일으키면서 기민(饑民ㆍ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방도를 마련코자 했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기민을 모아 제방을 쌓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수리시설을 마련하고 공사 기간과 참여 일수를 계산해 상을 내리고 새로 조성된 토지에 대해 세금을 탕감해주는 방안이었다. 흉년이 들면 잠시 세금을 탕감해 백성을 구제하는 대신 백성의 노역을 통해 농업을 위한 기반사업을 진행해 경제와 구제를 동시에 이루는 것이 진정한 진휼(흉년을 당해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책이라고 보았다. 
또한 서유구는 농업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농업 전문가를 양성해 전국에 파견할 것을 건의하는 등 장기적 계획을 세워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제안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가학(家學)이기도 한 농학을 체계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구마는 원래 중부 아메리카 지방에서 생산되던 식물로,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전했다. 굶주린 대마도인들이 이를 모래밭에 심어 죽어가는 부모를 살렸다하여 ‘고고이모(효자우)’ 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구마’라는 말은 ‘고고이모’란 일본말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고고이모’는 1763년에 통신사로 대마도에 갔던 조엄의 손을 거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여와 이듬해에는 동래와 제주도에서 심어본 일이 있었다. 
71세 때인 1834년, 전라도관찰사 재직 당시 서유구는 흉년을 당한 농민을 위해 구황작물인 고구마 종자를 급히 찾아오도록 명령했다. 구해온 고구마 종자를 도내 모든 고을에 배포했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ㆍ일본의 관계 농서를 참고해 이를 《종저보》(種藷譜)라는 이름으로 1834년에 목활자로 출판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종자별 파종 시기와 재배 방식 등 고구마 재배와 이용법을 집대성한 책이다. 
서유구는 주자학의 나라에서 주자학의 세례를 받은 사대부였지만, 선비가 땀 흘려 일하지 않고 관념적 학문에만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다.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지식은 ‘토갱지병(흙으로 끓인 죽과 종이로 만든 떡)’이라 하여 철저히 외면했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그는 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부엌에 드나들며 음식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쉰 살 때부터 기록하기 시작해 36년 동안(1806년∼1842년)에 걸쳐 조선 최고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완성했다. 
《임원경제지》는 113권 52책의 방대한 분량이다. 글자 수가 252만 자, 표제어만 2만8000여 개에 달한다. 여러 국내 농서와 중국 문헌 등 인용된 책의 종목이 자그마치 800 여 종이다. 다루는 분야도 농사ㆍ경제ㆍ축산ㆍ의학ㆍ상업ㆍ의례ㆍ건축ㆍ음식 등 열여섯 가지나 되는 백과전서이자 생활과학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런 규모의 저작은 그 시기 한ㆍ중ㆍ일을 통틀어 《임원경제지》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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