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11) 부여태후, 고구려 6대 태조왕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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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11) 부여태후, 고구려 6대 태조왕 어머니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5.2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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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일으켜 고구려 발전시킨 여걸

고구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조선 시대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고구려에서는 여성이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사례가 자주 보인다. 고구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소서노는 한 부의 우두머리로 추모왕(주몽)을 도왔고, 제9대 고국천왕과 제10대 산상왕의 정식 왕비로 지위를 누렸던 우씨왕후도 연나부의 우두머리였다. 
고구려 여인들은 길쌈과 농사짓기뿐만 아니라, 장사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자유롭게 시내를 활보할 수도 있었다. 고분벽화를 보면 여인들이 야유회를 하며 노는 모습이 보인다. 제천의식이었던 동맹(東盟) 행사에서는 여자들도 밤늦도록 술과 음식을 먹으며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다. 자기 뜻에 따라 결혼하고 이혼도 할 수 있었다. 평강 공주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온달과 결혼했다. 
모본왕이 제거되고 제6대 왕이 된 인물은 궁(宮)인데, 그가 바로 태조대왕이다. 궁은 유리명왕의 막내아들인 재사와 부여태후(夫餘太后)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조대왕은 한나라(후한ㆍ後漢)와 투쟁하고, 주변 소국을 통합하며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왕이다. 《삼국사기》 ‘태조대왕 즉위 조’에는 “모본왕이 세상을 뜨자 태자 익(翊)이 불초해서 나라를 맡길 수 없으므로 궁(宮)을 맞이해 왕위를 잇게 했다. 이때 나이 7세이므로 태후가 수렴청정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태조대왕의 어머니는 성명은 전해지지 않지만, 부여 출신이라고 하여 부여태후라고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모본왕을 죽이기 위해 두로를 하수인으로 삼은 배후세력에 대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모본왕이 살해된 후 누가 왕위를 이었는지를 살펴보면, 부여태후 세력임을 짐작할 수 있다. 모본왕의 태자가 있는데도 7세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웠다. 더구나 아버지 재사가 있는데도 부여태후는 친정인 부여 출신 세력과 함께 어린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수렴청정’이란 명목으로 정치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왕이 나이가 어린 경우에 성인이 될 때까지 왕의 어머니가 잠시 정치를 대행했던 수렴청정은 한국사에서 자주 있었다. 신라에 2번, 고려에 4번, 조선시대에는 8번 수렴청정이 있었다. 하지만 부여태후의 수렴청정은 다른 사례와는 매우 달랐다. 대부분은 남편인 왕의 지위를 물려받은 왕비들로 태후(대비)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했지만, 부여태후의 남편은 왕이 아니었다. 부여태후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왕으로 삼고, 스스로 왕의 권력을 가진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여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태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태조대왕의 나이 대략 18세에서 22세를 전후한 시기까지 수렴청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대왕 초기에 벌어진 일들은 거의 부여태후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부여태후는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태조대왕이 9살이 되던 해인 서기 55년에 신하들에게 지시했다. “고구려를 세운 지도 100년이 되어 간다. 나라가 더 크게 발전하려면 영토를 넓히고, 차지한 땅은 더 잘 다스려야 한다. 먼저 우리가 가진 요서 지역에 성 10개를 쌓아 후한의 침입을 막도록 하라.” 부여태후는 모본왕이 확보한 요하 서쪽지방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여기에 성을 쌓으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다. 
부여태후는 다음해 7월에는 군사를 보내어 지금의 함흥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동옥저를 공격해 그 땅을 차지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고구려는 이곳을 지배함으로써 동해의 수산자원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동해안 해안평야를 따라 남쪽 신라와 만날 수 있었으며, 바다 건너 일본열도로 나갈 수 있는 길도 얻게 되었다. 
부여태후의 열정 어린 노력으로 고구려는 동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청천강, 북으로는 부여국, 서로는 요서 지방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부여태후는 고구려를 더욱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성장한 아들 태조대왕에 권한을 넘겨주고 물러났다. 고구려 역사상 최초의 섭정으로서 국정을 훌륭하게 이끌었으며, 어떤 왕 못지않은 큰일들을 해낸 실질적인 여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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