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2) 금과 매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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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2) 금과 매우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6.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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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한글소설본 《설공찬전》 배경
우리마을 이야기 (2)

금과면 매우리(梅宇里)는 매우(중매우)ㆍ밭매우ㆍ신매우 마을을 통합해 부르는 법정리 명칭이다. 순창읍에서 약 7.7킬로미터(약20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매우리는 금과면사무소 소재지이며,  최초의 한글소설본(한문본을 번역한 것) <설공찬전>의 배경이 된 곳이다. 또한 누정(정자) 마을이기도 했다. 매우마을 뒷동산에는 현존하는 삼외당(三畏堂) 외에도 백정(栢亭)ㆍ삼지당(三知堂)ㆍ청취정(淸翠亭)ㆍ환취당(環翠堂) 등 누정 6개가 있었다고 한다. 

▲매우마을과 신매우마을 전경.

마을 유래와 현황

매우리는 고려시대에는 마을에 맷돌 형상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마암(磨巖)이라 했고, 조선시대에 매우(梅宇)라 불렸다. 마을 뒷산이 집안에 매화꽃이 만발한 형상이라 하여 ‘매화 매(梅)’에 ‘집 우(宇)’ 자를 써서 매우(梅宇)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회문산(어떤 이는 덕진산)의 매화꽃이 마암마을에 떨어져(梅花落地ㆍ매화락지) 매우라 불렀다고도 한다. 일제가 1914년, 큰 인물이 나올 것을 염려해 의미 없는 모정리(茅亭里)로 개칭했지만(삼외당ㆍ청취정 등의 누정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음) 마을 주민들의 건의로 2007년 10월 15일 옛이름인 매우리를 되찾았다. 
매우리에는 금과면사무소, 금과초등학교, 금과보건지소, 금과들소리전수관 등이 있다. 2020년 6월 5일 기준 매우리는 109가구에 인구는 215명(남자 103, 여자 112)이다. 매우마을은 순창설씨와 남양홍씨, 밭매우마을은 광산김씨ㆍ김해김씨ㆍ순창설씨, 신매우마을은 남양홍씨가 각각 토착성씨로 대종을 이뤄 마을을 형성했다. 

▲밭매우마을 전경.

<설공찬전> 무대, 매우마을

매우마을은 1511년(조선 중종 5년) 무렵에 채수(蔡壽ㆍ1449~1515)가 지은 한문소설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본 <설공찬전>(薛公瓚傳)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채수(蔡壽)가 지은 소설 <설공찬전> 원본은 한문이었지만 동시에 한글로 번역돼 유통 된,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보다 100년 이상 앞선 작품이다. 한문본밖에 없었던 이전의 책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까지 널리 인기를 얻고 영향을 미쳐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중종 때 왕명으로 수거돼 불태워진 후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 줄 알았지만 1996년 가을, 이복규 서경대 교수가 충북 괴산 성주 이씨 묵재공파 문중에서 소장해 온《묵재일기》에서 발견했다. 
<설공찬전>은 주인공 설공찬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그 혼이 돌아와 남의 몸을 빌려 이승에 머물면서 자신의 원한과 저승의 일을 기록한 내용이다. “예전에 순창에 살던 설충란(薛忠蘭)은 지극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매우 부유했는데 한 딸이 있어 서방을 맞이했지만,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죽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찬(公瓚)이고 아이 때 이름은 숙동이었다. 어릴 때부터 글공부하기를 즐기고 글쓰기를 아주 많이 잘했다. 갑자년에 나이 스물인데 장가를 들지 않고 있더니 병들어 죽었다”라고 시작된다. 순창이라는 실제 지역을 배경 삼아 순창설씨 집안의 실화라 표방하고, 등장인물도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교묘히 배합해 설정했다. 등장인물 가운데 설공찬의 증조할아버지인 설위와 설공찬의 아버지 설충란, 그리고 작은 아버지 설충수까지는 모두 족보에 나와 있는 실존 인물이다. ‘씨족원류’ 등에서는 공찬(公瓚)이 공양(公養)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복규 교수는 당시 연좌제에 의해 이름을 우회적으로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설공찬 숙부(작은아버지) 충수 생가터(추정).

큰 인물이 태어나면 회전한다는 마암

삼외당과 주변 바위, 나무를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계단을 내려가면 ‘마암’(磨巖)이라는 큰 바위가 눈앞에 나타난다. 큰 맷돌같이 생긴 이 바위는 “마을에 큰 인물이 태어나면 바위가 한 바퀴 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신령스러운 바위 옆에는 커다란 정자나무(팽나무)가 서 있다. 최근까지도 발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이 바위에 왼새끼를 꼬아 두르고 치성을 올렸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마을에 맷돌 형상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매우리를 마암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군자가 두려워하는 세 가지, 삼외당

삼외당(三畏堂)은 매우마을 서쪽 입구 언덕 바위 위에 있다. 이 마을 출신 홍함(洪函ㆍ1543~1593)이 젊었을 때 지었다. 홍함은 자는 양원(養源), 호는 삼외당(三畏堂)이다. 선조 때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사헌부 감찰, 문경현감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막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관직에서 물러나 임진왜란에 출전하기 전에 누정을 지어 자신의 호를 붙여 삼외당이라 이름 붙였다. 
삼외당은 화강암 지반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주간 거리 180센티미터)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로 지은 누정이다. 중앙 한 칸에는 방을 드렸다. 현 건물은 철종7년(1856년) 남양홍씨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정자 주변에는 수백 년을 지켜온 아름드리 고목들이 멋진 풍광을 유지하고 있어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자에는 홍함과 교류했던 호방했던 백호(白湖) 임제(林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충강공 김제민(金齊閔), 담양에서 의병에 참가해 공을 세운 충장공 양대복(梁大福) 세 사람의 시 3수가 현판에 걸려 있다. 이 정자를 삼외당으로 지은 이유는 이곳에 머문 선비가 벼슬에 대한 세 가지 덕목, 즉 세 가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라고 전해진다. 삼외(三畏)는 군자가 두려워하는 세 가지 일로,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을 두려워하는 것(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이다. 

▲삼외당.

뒷산에 있던 누정…백정ㆍ삼지당ㆍ청취정
 
매우마을 뒷동산에는 삼외당 외에도 누정 6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백정(栢亭)은 조선 전기 문인이었던 설위(薛緯)가 지어 소요처로 지낸 곳이다. 설위는 1419년(세종1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위로 급제했다. 시와 문장에 능했으며, 만경현령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현령 재직 때 청렴하고 근신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관찰사의 비방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떠나며 지은 시가 《패관잡기》, 《신증동국여지승람》<제34권> ‘전라도 만경현 명환편’ 등에 전한다. 

몇 해 동안 강가 고을에서 홀로 거문고를 울리며
(數年江郡獨鳴琴) 
뜻을 높은 산과 깊은 물에 두었네
(志在高山與水深) 
세상에서 종자기(鍾子期)의 귀를 만나기가 어려우니
(世上難逢鍾子耳) 
거문고 줄 가운데에 누가 백아(伯牙)의 마음을 알랴
(絃中誰會伯牙心)

삼지당(三知堂)은 설순조(薛順祖ㆍ1427~1496)가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 세웠다는 정자다. 설순조는 자(字)는 창윤(昌胤)이고 호(號)는 삼지당(三知堂)이다. 단종 2년 무과에 급제해 부사직이 되었다.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세조 원년(1455) 좌익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自號)를 삼지거사(三知居士)라 하고 삼지당(三知堂)을 지었다. 단종이 영월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5일간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에 살던 귀래정 신말주도 삼지당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설순조는 27년만인 1483년에 성종의 간곡한 부름에 부산포 첨절제사에 임명됐다. 이후 상주목사ㆍ성주목사ㆍ김해부사ㆍ황주목사 등을 지냈다. 
 
청취정(淸翠亭)은 매우리 뒷동산에 있었다는 정자다. 은거 군자 설홍윤(薛弘允ㆍ1515~1583)의 정자였다고 전해온다. 16세기 중엽 이후 훼철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홍윤은 1537년(중종32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하서 김인후 등 여러 선비와 더불어 경전을 논하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은 그를 극찬했다. 율곡 이이는 ‘고상한 선비’라 했고, 하서 김인후는 ‘학문의 집대성’이라 했으며, 서하 이상민은 ‘은거 군자’라 했다. 

▲백정ㆍ삼지당ㆍ청취정 등이 있던 매우마을 뒷산에 백로 무리가 한가롭게 날고 있다.
▲백정ㆍ삼지당ㆍ청취정 등이 있던 매우마을 뒷산에 백로 무리가 한가롭게 날고 있다.


밭매우 누석단

밭매우마을은 누정(삼외당) 밖에 위치한 매우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이 곱다란 야산을 뒤로하여 마치 갈치처럼 기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 경지와 마을 왼쪽 드넓은 평지에서 양질의 쌀이 생산되어 옛날부터 많은 기와집이 들어선 부자마을로 불렸다. 
밭매우마을 앞들에는 누석단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이 ‘키’(일명 치) 형국이라 곡식을 까불리다 양옆으로 흘러 버려 부를 누릴 수 없을 것을 염려해 액막이 보비가 필요했다. 그 대책으로 마을 앞 논 양편에 둘레 7미터, 높이 3미터 규모로 쌓은 석탑이다. 

▲밭매우마을 입구 누석단.

순창농요 금과들소리 전수관

‘순창농요 금과들소리’는 500여 년 전부터 매우리를 중심으로 동전, 대장 들녘에서 불리던 농업 노동요다. 힘든 농사일 품앗이로 극복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점차 잊혀가다가, 농사를 지으면서 들소리를 불렀던 경험이 있는 노인들을 중심으로 금과들소리 발굴단을 구성해 1997년 복원했다. 1998년 10월 2일 ‘순창농요 금과들소리 전수회’를 창립라고, 2002년 제43회 한국민속예술축제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예산 12억원을 들여 실내와 야외 연습을 할 수 있는 ‘순창농요 금과들소리 전수관’을 매우리에 준공했다. 

▲순창농요 금과들소리 전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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