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6) 유등면 유촌리-고뱅이와 버드나무로 유명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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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6) 유등면 유촌리-고뱅이와 버드나무로 유명한 곳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7.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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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6)

유촌리(柳村里)는 유촌(柳村)마을과 유천(柳川)마을, 책암(冊巖)마을을 합해서 부르는 법정리 명칭이다. 유등면 동남쪽에 위치한 유촌리는 북쪽으로는 오교리, 동남쪽으로는 남원시 대강면 월탄리, 북서쪽으로는 외이리, 서남쪽으로는 풍산면 두승리와 접한다. 섬진강이 유촌리 왼쪽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유촌마을과 유천마을 전경.

마을 유래와 현황

섬진강 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서 있었기에 ‘버들’이라고 부르다가 한자음으로 ‘유촌(柳村)’, ‘유천(柳川)’ 마을이 되었고, 책암마을은 책 모양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1979년 남원시 대강면 입암리 일부 지역이 대통령령으로 책암마을에 편입되었다. 유촌리 인구는 2020년 6월 기준 119가구, 241명(남 114, 여 127)이다. 토착 성씨로는 이천서씨(利川徐氏), 옥천조씨(玉川趙氏), 평강채씨(平康蔡氏), 동래정씨(東萊鄭氏) 등이 있다.

▲책암마을 전경.

고뱅이 어살 

고뱅이는 유촌리와 내이리 사이 섬진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순창뿐만 아니라 주변 남원, 곡성 사람들도 예부터 자주 찾던 유원지다. 사계절 중 봄기운이 완연한 4∼5월이 가장 아름답다. 유원지 내에 별다른 편의시설은 없지만, 섬진강의 색다른 매력에 듬뿍 빠지게 하는 명물이 바로 고뱅이 어살이다. 
고뱅이 어살은 조선 중기 때부터 각종 기록에 보인다. 자연석으로 강을 ‘브이(V)’자 형으로 막아 쌓고, 가운데 부분에 물이 지나가도록 한 곳에는 대나무와 발을 엮어서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던 물고기들이 잡히도록 만든 것이다.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자연을 이용한 고기잡이 방식이다. 이렇게 잡힌 참게, 잉어 등은 순조 임금 때 진상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 명물로 자리 잡았던 어살은 88고속도로 건설로 그 자리에 섬진교가 들어서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2003년 12월에 유등면민의 뜻을 모아 섬진교 아래쪽에 다시 복원되었다. 고뱅이 유원지 입구에 이를 기념하는 어살복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고뱅이 어살(1966년 사진).

어초정

어초정(魚樵亭)은 유촌마을 남쪽에 세워진 정자다. 이 정자는 평택임씨 어정(漁汀) 임종주(林棕周)와 초봉(樵奉) 임한주(林漢周) 형제가 우애하며 담락(湛樂, 오래도록 즐김)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인 1929년 4월에 세운 것이다. 자기들 호의 첫 글자를 따서 어초정(漁樵亭)이라 불렀다. 임한주가 이곳에서 읊은 시에서 “작은 정자 늦게 얻어 유유자적 하는 곳과 이웃하여 고기 잡고/ 땔 나무 함을 일삼으니 성시의 티끌을 멀리 하네”라고 했듯이 귀거래사 같은 삶을 즐겼던 곳이다. 현판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왕(義王ㆍ의천왕) 이강(李堈ㆍ1877~1955)의 친필이라 한다. 
어초정 주변 바위에는 집정조대와 정자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적성강에 노니는 은어를 잡는다는 뜻의 낙정조기(樂亭釣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낚시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도 야인 시절 이곳 주변에 들러 낚시했다는 낚시터 상석이 전해온다. 어초정과 고뱅이 유원지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음력 4월 12일이면 관찰사를 비롯해 순창ㆍ남원ㆍ임실ㆍ담양ㆍ곡성 등지에서 유학자 100여 명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시와 풍류를 즐겼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어초정.
 
▲대원군 낚시터 상석.
 
▲책바위.
 

어부와 코바위, 고뱅이 전설

옛날 고씨 성을 가진 한 남자가 부인과 함께 유촌마을 부근에서 앞으로 살아갈 보금자리를 짓고자 온종일 헤맸으나 집터를 정하지 못하고 해가 저물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산자락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도승이 나타났다. “너희가 지금 잠자고 있는 곳에 집을 지으면 안락하리다. 강가에 가면 돌 밑에 물고기가 풍부한 곳이 있으니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잠이 깬 후 아침 일찍 그곳에 가보니 과연 바위 밑에는 어류가 가득했다. 고씨 어부는 도승이 일러준 대로 집을 짓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아침에는 강을 향해 대나무 통발을 놓고, 저녁이면 반대 굴 쪽으로 놓고 물고기를 잡아 매일 순창, 남원, 옥과 등으로 다니면서 물고기를 팔아 쌀과 소금 등을 교환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물고기를 지게에 지고 남원으로 향했다. 이날 따라 해가 저물 무렵에야 물고기가 팔려 곡식과 소금 등으로 교환해 등에 지고 오다가 너무 어두워 길을 잃고 산에서 헤매다 그만 그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고뱅이 뒤편에는 도적굴이 있었다. 그중 한 도적이 밤에 굴로 돌아가는 중에 때마침 목욕하던 어부의 아내를 보고, 순간 욕정을 참지 못해 아낙을 범하려 했다. 아낙은 강하게 저항했다. 욕심을 채울 수 없어 화가 난 도적은 몸에 지니고 있던 칼로 아낙네의 코를 베어버렸고, 이어 방에서 자는 어린 아들의 코까지 베려 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며 도적은 즉사했고, 모자는 돌로 변하고 말았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부인과 아기가 돌로 변한 것을 보고 한탄하며 자신이 자주 고기 잡던 조대 앞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강물에 빠져 죽은 어부도 바위로 변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석바위라 부르고 여자가 죽어 변한 바위를 코바위라 불렀다. 세월이 흐른 후 코바위 골을 어부의 성 고를 따서 고뱅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뱅이 어살(2010년 사진).
▲코바위.

섬진강 뱃나루터와 주막, 팽나무

섬진강 뱃나루터는 지금의 유촌교 입구 버들주막이 있던 곳이다. 주막 입구에는 400년 된 아름드리 팽나무가 주막집을 둘러싸서 이곳을 지나던 주민과 행락객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뱃나루터는 버들마을 주민에게 조상 대대로 애환과 추억을 간직한 곳으로 마을의 상징이 되었던 장소이다. 학생들은 이곳 강가에 소풍 와서 다슬기와 재첩을 잡으며 추억을 쌓았고, 어른들은 은어ㆍ피라미ㆍ모래무지 등을 천렵해 안주로 곁들이며 막걸리 한잔하며 놀던 곳이다. 
옛날에는 이곳 나루터에서 남원 대강면 등을 왕래할 때 나룻배를 교통수단으로 사용했다. 나룻배를 이용한 주민들은 봄ㆍ여름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나락 한 말 등을 사용료로 대신하기도 했다. 장마철에 강물이 범람해 배를 움직일 수 없을 때는 ‘적성교’를 통해 왕래하기도 했다.
1974년 유촌교가 건설되면서 나룻배와 주막집은 사라지고 400여 년 된 팽나무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고목은 섬진강 제방공사(2006년~2009년)를 하면서 말라 죽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마을 주민들은 공사 시행청인 익산국토관리청에 민원을 제기해 2013년, 보상금 1850만원을 받았다. 2014년 1월, 버들마을(유촌ㆍ유천ㆍ책암) 이장과 개발위원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등이 모여 보상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의논했다. 버들마을 주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담겨 있는 이곳에 후손들이 역사 교육 장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념비를 세우고, 새 나무도 심은 쉼터를 조성하고 제막식을 치렀다. 

▲나루터와 팽나무가 있던 유천교 부근. 다리 왼쪽은 섬진강군민체육공원이다.

섬진강군민체육공원

섬진강군민체육공원은 군민들의 건강 증진과 건전한 여가활동을 위해 섬진강 변에 건립했다. 10만 평방미터(㎡) 대지에 사업비 6억을 들여 1997년에 조성했다.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솔솔 부는 강바람으로 인해 더운 줄 모르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어 군민뿐만 아니라 타 시ㆍ군 지역민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3층 건물로 본부석이 있고, 축구장 2면, 배구ㆍ족구장 2면, 운동기구 10점을 갖추었다. 관중석은 500석 규모이고, 총 수용 인원은 1500명이다. 축구장은 파란 잔디가 촘촘히 자라고 있어 월드컵 꿈나무인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축구장 외곽으로 자전거 전용도로가 조성되어 있어 자전거를 즐기기에도 더없이 좋다. 천연잔디 보호 차원에서 매년 11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는 출입을 통제한다. 체육공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7일 전에 유등면사무소에 사용 신청해야 한다.

▲나루터권역 커뮤니티센터.

유등 나루터권역 커뮤니티센터 

유촌마을 인근에 자리 잡은 나루터권역 커뮤니티센터는 농촌체험 휴양시설이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 동안 국비 27억원 등 모두 39억6000여만원이 투입돼 2019년 4월 30일 준공식을 했다. 전체 면적 864평방미터로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동과 체험동이 들어섰고, 각종 회의와 워크숍이 가능한 세미나실, 어린이놀이터 다목적광장 등도 갖췄다. 


화남사

유천마을 뒤편에 있는 화남사(華南祠)는 고려 고종 때 효자로 이름난 이천서씨 서릉을 비롯해 그 후손 중 효와 절행(節行)이 뛰어난 서식, 서숭로, 서영우를 모신 사우(祠宇)다. 1949년 이천서씨(利川徐氏) 문중과 유림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부속 건물로 모효재(慕孝齋)가 있다. 
서릉(徐稜)은 《고려사》 <효우전>(孝友傳)에 수록된 고려를 대표하는 효자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평생 벼슬하지 않았으며, 엄동설한에 개구리를 구해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서식(徐湜)은 서릉의 9세손으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모두 6년 동안 시묘를 한 효자다. 서숭로(徐崇老)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전투하다 한산도해전에서 순절했다. 서영우(徐永佑)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화의(和議)가 결정됐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화남사.

효자 신상용 정려

신상용(申尙溶ㆍ1577~1618)은 귀래정 신말주의 6세손이다. 평생 부모를 모심에 정성을 다했다. 병든 아버지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한겨울에 얼어붙은 강가에 나가 얼음을 깨서 잉어를 구했다. 또 생대추를 먹고 싶어 하는데 엄동설한이라 구할 길이 없어 나무 아래서 슬피 울자 눈 덮인 가지에 꽃이 피면서 푸른 대추가 열렸다. 이 같은 노력에도 아버지가 사망해 상여가 나가는데 장마로 적성강(섬진강)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신상용이 슬피 우니 강물이 잠시 멈춰 무사히 상여가 갈 수 있었다. 삼년상을 치르며 죽만 먹고,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실명했다. 이후 깊은 병에 걸려 5년 동안 여러 번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곤 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42세로 세상을 떠났다.선조(宣祖)가 신상용의 효행을 듣고 신상용이 생존해 있던 1608년(선조 41) 정려를 내리고 《삼강록》<효자도>에 들게 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贈職)했다. 신상용에 대한 기록은 《삼강록》(三綱錄)ㆍ《옥천군지》ㆍ《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여러 곳에 수록돼 있다. 1875년(고종 12) 정려를 중건했고, 1999년 4월에 다시 정려를 중수했다. 효자 신상용 정려는 유촌마을 동북쪽 무수리 길가 동쪽 산기슭에 있다. 신상용 정려는 그가 잠시 피난 갔던 진주 덕산동(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부리)에도 세워져 있다. 


유촌리 비석 떼

유촌교 건너 유촌리 어귀에 비석 4기가 서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참봉 홍공 순응 유혜비(參奉洪公淳應遺惠碑)와 이 마을에 살았던 서 효자 병홍 지비(徐孝子炳泓之碑), 고 서 효자 준여 지비(故徐孝子俊汝之碑), 효열부 전주이씨 기적비(孝烈婦全州李氏紀跡碑) 이다. 참봉 홍공 순응 유혜비는 1919년 마을 주민들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세웠으며, 서병홍과 서준여의 효자비, 효열부 전주이씨 기적비는 효자와 열녀의 행적을 기념해 세웠다. 유촌리 유혜비와 효자비, 열부비는 마을의 깊은 역사를 말해 줌과 동시에 마을의 풍속을 정화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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