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2) 순창읍 누정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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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2) 순창읍 누정②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8.0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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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누정을 찾아서 (2)
순창객사, 관정루, 교용정과 관덕정, 귀래정, 귀미정, 순창 누교, 돈암초당

조선 말기에 쓰인 작자 미상의 가사 <조선팔도 노래>에서도 순창의 여러 누정이 보인다. 

백제 때 도실이다가 신라에서 순화라네
고려에서 순창이고 다른 이름 오산 옥천(중략)
대모산성(大母山城) 관정루(觀政樓)와 북루(北樓)가 솟아있다
취홍정(翠紅亭) 온진정(蘊眞亭)이요(후략)

 

▲순창초등학교 교정에 자리한 순창객사. 1974년 전북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됐다.

순창객사


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교정에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1974년 전북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된 순창객사(淳昌客舍)다. 창건 연대는 불확실하며, 현재 건물은 1759년(영조 35)에 중건했다. 
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중앙 정당(正堂)에 ‘전하(殿下) 만만세(萬萬歲)’라 새긴 전패(殿牌)가 봉안되어 있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해 이곳에서 예를 올렸다. 새로 부임한 수령은 이곳에 와서 참배하고, 국상을 당할 때 전패에 절을 했다. 국왕의 명을 받은 중앙의 사신이나 관료가 순창에 왔을 때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당대의 인사들이 왕래했다. 객사는 수령이나 관찰사가 일을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으며, 관리는 이곳에 머물면서 교지(敎旨)를 전하기도 했다. 
순창객사는 1905년 구한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다음해 6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 800여 의병이 진을 치고 항전했던 구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순창객사는 당초에는 중앙에 정당(正堂), 좌측에 동재(東齋ㆍ동대청), 우측에 서재(西齋ㆍ서대청), 전면에 중문(中門), 외문(外門), 측면에 낭무(廊廡)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정당과 동재만 남아 있다. 정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은 팔작지붕집으로 안의 바닥은 벽돌을 깔았다. 동대청은 앞면 5칸ㆍ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기둥은 민흘림기둥이고, 주초석은 장대석 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시대 관청을 없앤다는 식민정책에 따라 전국 많은 객사가 불하(拂下ㆍ팔아넘김)되고, 다른 목적으로 쓰이면서 구조가 변형되기도 했다. 현존 건물 정당과 동재도 한때 순창초등학교에서 교무실, 교실, 도서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동재의 경우, 교무실로 사용해 오다가 1968년, 천장에 판자를 넣어 우물천장을 만드는 등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 충량(衝樑ㆍ한 끝은 기둥에 짜이고 다른 끝은 들보에 걸치게 된 측면의 보)을 걷어냈는데, 그때 필자가 목격한 바로는 충량이 한 마리 거대한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후 1981년 2월에 전면을 해체해 기와를 깔고, 뒷면 북쪽 지붕의 서까래 일부를 완전 보수했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단청공사와 벽체 보수 등을 하여 관리하고 있다. 순창군은 동재 건물에 걸려 있던 ‘순화아문(淳化衙門)’ 현판을 2015년 1월 2일 ‘옥천지관’으로 교체했다.


관정루 


관정루(觀政樓)는 객관 남쪽에 있던 관(官)누정이다. 태종 때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허주(許周ㆍ1359~1440),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힘쓴 최항(崔恒ㆍ1409∼1474) 등 많은 관리와 선비가 방문해 남긴 시가 기록돼 있다. 다음은 조선 중기 사림(士林)의 영수 김종직(金宗直ㆍ1431~1492)이 전라도관찰사를 지낼 때 이곳 관정루에 올라 읊은 시다. 

관찰사 직무 일 년여에 헛된 이름만 훔치고 
관정루 안에서 누룩 빚은 아이를 불렀네
정히 옷깃 헤치고 번뇌를 몰아내야지 
얼굴 씻으러 맑은 물 떠올 것 없어라
한 곳을 여행하는 나그네는 
-마음에 걸리니 시끄럽고 
가정에서 밥 짓는 연기는 
-숲 끝에 펀펀하구나 
예부터 순창(淳昌)은 순박하다 불렀으니 
장부에 적기를 마치니 새 소리가 들리네 

성종 때 이조ㆍ형조 판서를 역임했던 이승소(李承召)도 이곳에 들러 시를 읊었다. 

충신(忠信)한 고을 예로부터 이름 있으니 
송사(訟事)하는 동헌 뜰에 사람이 없고
-푸른 이끼만 끼었도다. 
누를 지으니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하고 
정사가 간이(簡易)하고 사람들 화목하니
-물과 같이 맑도다. 
천리의 물과 산은 승경(勝景)이 많고 
-일헌(一軒)의 풍월(風月) 태평성세 이루네 
은근히 남유객(南遊客)에게 말하노니 
-곳곳에서 현가성(絃歌聲)을 들어보라


교용정과 관덕정

 
교용정(敎用亭)은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지은 정자로 활을 쏘며 심신을 수양했던 곳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유고(旅菴遺稿)》에 <교용정중건기>(敎用亭重建記)가 전한다. 1655년(효종 6) 고을 수령 이산뢰가 관덕정(觀德亭)이란 이름으로 대교천 변에 처음 세운 뒤 순창군수 송시걸(宋時杰)이 1672년(현종 13) 중건했고, 우암 송시열이 교용정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송시열은 송시걸의 형). 1780년(정조 4) 군수 송문상(재임기간 1732~1734)이 중수한 것을 현재의 수령 홍익철(재임기간 1779~1780)이 보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누정 위치는 대교천(경천) 위에 있었다고 한다. 군청 앞 교성리 건너가기 전 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남계리 사정 1교 대교천 변으로 보기도 한다. 


 

▲1975년 2월 5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67호로 지정된 귀래정(歸來亭).

귀래정

귀래정(歸來亭)은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신말주(申末舟ㆍ1429~1503)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즈음해 한동안 벼슬을 버리고 처가로 내려와 조성한 정자다.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 솔숲이 울창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귀래 신선생 유허비’(歸來申先生遺墟碑)는 1455년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신말주가 벼슬을 사임하고 귀거래(歸去來)한 장소임을 밝히는 표석이다.
신말주는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이곳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이러한 사연으로 하서 김인후를 비롯해 숱한 시인 묵객이 이곳에 들렀다. 귀래정은 신말주가 말년에 순창 십로(淳昌十老)와 더불어 유유자적했던 무대이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한평생을 살고자 한 올곧은 조선 선비의 혼이 깃든 55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다. 
현 정자는 쇠락한 것을 1974년에 다시 고쳐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건물 중앙에 방이 가설되어 있고, 3점의 ‘귀래정’ 현판이 걸려 있다. 2점의 현판은 측면에, 1점은 정면에 걸려 있다. 정면의 현판 옆에는 1930년에 신말주의 18세 방손 신덕선(申德善)이 쓴 ‘한운야학(閒雲野鶴)’(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들에 노니는 학처럼 아무 속박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상황을 뜻함)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에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귀래정기’(歸來亭記)와 강희맹(姜希孟)의 시문 등도 액판으로 걸려 보존되고 있다. 1975년 2월 5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귀미정

 
《대동지지(大東地志)》‘순창군 누정조’에 “귀미정(歸米亭)은 남쪽으로 약 3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636년 이조좌랑 관서어사 등을 지낸 유항(柳巷) 유영(柳潁)이 귀미정에 올라 “길손이 가는 길은 산곽에 임했는데, 계절은 보리 가을이 되었더라”며 감흥을 읊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전에 지어진 누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순창 누교

 
누교(樓橋)란 ‘건너니 다리요, 머무르니 누각이라’ 했듯이 교루(橋樓)라고도 부르며 다리 위에 누각을 설치해 흐르는 물을 관조하는 형태를 말한다. 
순창군에도 조선시대에 누교가 있었다. 1872년(고종 8)에 간행한 지도에 노령 아래서 발원해 순창읍치 동쪽 대동교(大同橋), 지금의 순창 읍내 사정교 부근에서 경천과 만나는 하천 중간에 누교(樓橋)를 표시하고 있다. 이 하천은 이름을 후천(後川ㆍ현재 양지천)이라 했다. 아마도 읍치 뒤 하천이라 그렇게 부른 것 같다. 


돈암초당

 
돈암초당(遯菴草堂)은 단종에 대해 절의를 지킨 순창 절의신(節義臣) 10명 중 한 사람인 돈암(遯菴) 장조평(張肇平ㆍ1429~1501)이 벼슬을 등지고 은거했던 곳이다. 다음은 그가 은거지 돈암초당에서 읊은 시다.

추산(追山) 아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길은 맑은 시냇물 따라 뻗어 있구나
산은 높고 물이 수려하여
깊고 깊은 심산유곡이네  
숨은 곳 이곳에는 보리가 익어 가고
속세를 떠난 이곳은 청화(淸和)한 가을이네

장조평의 자는 자형(子衡), 흥성장씨(興城張氏)로 세종 10년 남원에서 출생했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충순위(忠順衛)로 관직을 시작했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端宗ㆍ1441∼1457)을 폐위하고 제7대 왕위에 오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해 추산(追山), 현재의 순창읍 금산에 은거했다. 
귀래정 신말주의 주도로 열 사람의 나이 든 명사들이 십로계 모임을 만들 때 그도 함께했다. 중국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본뜬 이 모임은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동향 사람끼리 서로 술을 나누고 시를 읊는 풍류를 즐기며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연산군 5년(1499)에 70이 넘은 노인을 불러 모아 “우리가 같은 시대에 같은 땅에 태어났으니 그것도 인연이다”라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들의 화상을 그려 하나의 축(軸)으로 만든 <십로계첩>(十老契帖)이 남아 있다.

장조평이 추산에 은거할 때 심정을 읊은 시 <추산유거제영>(追山幽居題詠)에서 그의 심정을 이렇게 나타냈다. 

노릉(魯陵)의 송백(松栢)은 울창해 
-푸름을 더하는데
봄날 두견새 울 때 내 마음 서글프고
남아 있는 외로운 신하 아직 살아남아 있어
어느 날 운향(雲鄕)에서 뵈올지 
-알지 못하구나.

(魯陵松栢鬱蒼蒼 蜀魂聲中春意忙
-遺落孤臣尙未死 不知何日陪雲鄕) 

시에서 두견새는 망제(望帝)의 혼(魂)이라 해 단종의 죽음을 비유했다. 이는 옛날 주나라 때 제후국 중 촉(蜀)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이고 망제(望帝)로 불린 임금이 있었는데,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 도망해 복위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어 봄철에 밤낮으로 슬피 운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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