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8) 적성면 고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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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8) 적성면 고원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8.1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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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8)
성면 고원리(古阮里)는 채계산을 바라보며 적성강을 끼고 평야 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행정마을은 관평ㆍ지내ㆍ모산ㆍ원촌 마을이다. 백제 때는 역평현(礫坪縣), 후기 신라시대 때는 적성현의 행정 치소가 있었고, 현재는 적성면 소재지다. 2020년 8월 3일 현재 인구는 169가구, 318명(남자 146, 여자 172)이다. 

적성면 고원리(古阮里)는 채계산을 바라보며 적성강을 끼고 평야 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행정마을은 관평ㆍ지내ㆍ모산ㆍ원촌 마을이다. 백제 때는 역평현(礫坪縣), 후기 신라시대 때는 적성현의 행정 치소가 있었고, 현재는 적성면 소재지다. 2020년 8월 3일 현재 인구는 169가구, 318명(남자 146, 여자 172)이다. 

마을 유래

관평(官坪)마을 앞 들판은 순창군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들판은 넓으나 물이 없어 건평(乾坪)이라고 부르다가 관원이 많이 배출되자 관(官)으로 바꿔 관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촌(院村)마을은 원(院)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원촌이라 했다. 삼국시대부터 순창에도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읍에서 동쪽으로 10킬로미터(㎞)쯤 되는 적성강 나루 위에 적성원(赤城院)이 있었다.  
지내(池內)마을은 방죽 안 동네라는 데서 유래했다. 1950년대까지 주변 산에서 발견되었던 고려장 흔적이나 1760년 간행된 《옥천군지》 기록, 옹기를 만들었던 점촌 등의 지세를 보면 마을 역사가 꽤 깊었던 것 같다.
모산(茅山)마을은 우계제(고개) 부근에서 한 지맥은 지내 쪽으로 내려가고 한 지맥은 남쪽으로 뻗어내러 가다가 동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서 ‘못안(모사니)’으로 부르다가 모산으로 개칭해 부르게 되었다.

▲관평마을 전경.
▲지내마을 전경.
▲모산마을 전경.

적성현

《고려사》<지리지> ‘남원부 적성현조’와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남원도호부 순창군조’에 의하면 적성면 지역은 삼국시대 백제 때는 섬진강 조약돌처럼 빛난다하여 ‘조약돌 력’자를 써서 력평현(礫平縣)으로 불렸다. 후기 신라시대에 적성현으로 개칭되어 순화군 소속 현이 되었고, 고려시대에 순화군이 순창현이 되면서 적성현은 남원의 속현이 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승려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라 하여 순창현이 순창군으로 승격되면서 적성현은 폐현되고 순창군에 속해 적성방(赤城坊)으로 불렸다. 1897년(고종 34) 방(坊)을 면(面)으로 개칭하면서 오늘날의 적성면이 되었다. 

▲1971년 적성 소재지 도로(위)와 2001년.(아래)

적성강 나루터

적성강나루터(적성진ㆍ赤城津)는 고원리에 있었다. 조선시대 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남원부 서쪽 약 35리(13.75킬로미터) 되는 서림원에 있었다고 한다. “적성진(赤城津)은 일명 화연(花淵)이라고도 하는데, 적성산(赤城山ㆍ채계산) 아래에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령스러운 것이 있다고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성진 하류가 저탄(猪灘)이며, 다시 동으로 흘러 남원부의 연탄(淵灘)이 된다. 적성진은 1950년대까지도 비가 내려 물이 넘치면 나룻배로 건넌다고 했는데, 순창과 남원군 대강면을 잇는 길이었다. 현재는 도로 발달로 나루의 기능은 상실했다. 
적성진과 관련해 여러 시가 있다. 다음은 고려 중기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적성강(赤城江)을 건너다>이다.

술 취한 늙은이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실었으니
석양에 돌아오는 행색 그림 속이로구나.
평소에 화산(채계산) 경치 좋다 하기에
부질없이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푸른 하늘을 가리키네.
화산이 가장 뛰어난 절경인데 마침 저물 무렵 도착했다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중시조로 평가받는 김종직(金宗直)도 <적성진에서>라는 시를 지었다.

적성현 터는 이제 황량한 언덕이 되었건만
(赤城縣址今荒丘ㆍ적성현지금황구)
적성진의 물은 밤낮으로 흐르는구나
(赤城津水日夜流ㆍ적성진수일야류)
으슥한 숲속 사당에는 소고 소리 요란하고
(叢祠翳翳殷簫鼓ㆍ총사예예은소고)
시장 바닥에는 시끄러이 우마가 왕래하네
(場市喧喧交馬牛ㆍ장시훤훤교마우)
눈에 가득한 운산은 장차 저물려 하는데
(滿目雲山將薄暮ㆍ만목운산장박모)
전답에 그득한 곡식은 정히 깊은 가을일세
(盈疇黍稌正深秋ㆍ영주서도정심추)
멀리 보건대 앞 비탈에 삼홀 착용한 관리는
(遙見前崖衫笏吏ㆍ요견전애삼홀리)
가는 깃발이 또 대방주를 향하는구나
(旌旗又向帶方州ㆍ정기우향대방주)

 

▲1960년대 적성강나루터 모습 -사진 제공 적성면사무소

적성삼화와 월화교

적성면을 휘감아 돌며 흐르는 섬진강의 상류인 적성강(赤城江)은 채계산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내고, 강을 품은 들판은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근 남원, 임실, 옥과, 곡성 등지의 수령들은 이곳에 부임하기를 소원했다고 한다. 더욱이 적성강에는 맑은 물에 조약돌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달이 떠오르는 날이면 채계산의 모습이 물 위에 어려 매우 아름다웠다. 그래서 풍류객들은 이곳에 발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적성강에 배를 띄워 놀다가 시흥(詩興)이 나면 서로 화답했다.
당시 적성현에는 미모가 빼어난 관기와 기녀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시화와 가무에 능한 세 명의 기생이 있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적성삼화’(赤城三花)라 불렀다. 그들의 이름은 월화, 월선, 월계였다. 보름달이 밝은 밤이면 채계산 아래 적성강에는 적성삼화와 함께 뱃놀이하며 달맞이를 즐기려는 풍류객들이 넘쳐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보름달은 휘영청 밝아 풍류객들은 적성삼화와 함께 흥겨운 뱃놀이를 즐겼다. 주흥이 나면 더욱 흥을 돋우고자 기생들의 손목을 잡고 배 위에서 바위 위로 뛰어오르고 내리길 반복했다. 기생들은 열두 폭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풍류객과 서로 손을 잡고 배 위에서 바위로,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뛰어오르곤 했다. 그렇게 취흥이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다. 적성삼화 중에서도 가장 미색이 뛰어났다는 월화(月花)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물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월화가 빠져 죽은 바위 징검다리를 ‘월화교’(月花橋)라 부르게 되었고, 월화가 발을 헛디딘 바위를 ‘월화암’(月花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리 옆에 100여 명이 앉아 즐길 수 있는 기생바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적성삼화와 월화의 죽음 이야기는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애틋함을 더하며 전해오고 있다. 

현대사의 증인, 적성교

원촌마을 앞 국도 24호선 통과 지점에는 제1 적성교(赤城橋)와 제2 적성교가 있다. 적성교는 고원리 원촌마을과 괴정리 신월마을 사이 적성강을 연결하는 다리다. 
제1 적성교인 원다리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묵묵히 말해 주고 있는 증거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건설된 이후 수탈한 순창군의 물자를 남원으로 실어 나르는 통로였으며,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이 남침해 순창 지역까지 밀고 내려오자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군 폭격기 비(B)29가 다리 상판 2칸을 폭파하고 채계산에 부딪혀 산화한 역사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원다리를 건너 일광사 앞으로 가던 구 도로는 지금은 섬진강 종주 자전거 길로 이용되고 있다. 제2 적성교는 2000년 12월 26일에 착공해 2005년 12월 31일에 완공했다. 길이 310미터, 폭 11미터의 4차선 다리다. 

▲원촌마을과 제1 적성교(오른쪽 아래)와 제2 적성교(오른쪽 위).

관평ㆍ원촌 유적지와 말 무덤

고원리 관평ㆍ원촌 유적(遺蹟)은 적성면 고원리 671-3번지에 자리한다. 동쪽에 원촌 유적이, 서쪽에 관평 유적이 있다. 호남문화재연구원 주관으로 2001년 12월 20일부터 2002년 3월 19일까지 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2003년 5월 12일부터 12월 31일까지 순창 적성 우회도로 축조 및 포장공사 구역에 포함된 지역을 대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원촌 유적은 남원 대곡리 유적 등과 함께 섬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방 신석기문화 전개 과정을 밝히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방에서 처음으로 각목 돌대문 토기가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백두대간 동쪽 남강 유역 청동기문화와의 관련성이 제기되었다. 
관평 유적에서는 14동의 건물 터와 담장 터, 제련 시설이 조사되었다.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기와류, 청자류, 도기류가 상당량 출토되었는데, 이들 유물은 고려전기 남원부에서 순창군으로 귀속되면서 적성면에 설치된 적성방(赤城坊)의 존재와 그 성격을 연구하는 데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외에도 관평마을에는 말 무덤 유적이 있었다. 관평마을 중심지에서 순창읍 방향으로 30미터되는 지점에 조선시대 감옥이 설치돼 있었다. 감옥 안에 길이 7미터, 넓이 5미터, 높이 6미터 규모의 말 무덤이 존재했으나 1970년 경지정리 때 훼손됐다고 해 아쉽기 그지없다.


지내 방축

지내 방축(防築)은 지내마을에 있는 방죽이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읍지》에 “둘레가 734척(222.42미터)이며 적성진 서쪽에 있다(池內防築 周回七百三十四尺 在亦城津西)”라고 나와 있다.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옥천군지》에는 “군 동쪽 20리(7.85킬로미터) 적성방(赤城坊)에 있고, 둘레는 634척(192.12미터), 깊이는 3장(池內防築 在郡東二十里 赤城坊 周回六百三十四尺 深三丈)”이라고 했다. 1872년(고종 9)에 작성된 《순창군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내 방축 옛 모습(사진 최윤화 씨 제공) 
▲지내 방축 현재 모습.

적성초 독립기념비와 플라타너스

1935년 5월 23일에 개교한 적성초등학교에는 ‘독립기념비’가 있다.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독서하는 소녀상’이 있고 그 뒤에 ‘독립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적성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 대한민국 독립과 정부 수립을 축하하고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세웠다. 
기념비 뒷면에 1948년인 단기 4281년 8월 15일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1회 졸업생들은 모교에 플라타너스도 심었다. 8그루를 심었던 것 같은데 현재는 7그루가 남았다. 나무 둘레가 3미터 이상이고, 가장 큰 나무는 둘레가 4미터90센티미터나 되는 위용을 뽐내고 있다.

▲적성초등학교에 있는 ‘독립기념비’. 제1회 졸업생들이 대한민국 독립과 정부 수립을 축하하고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세웠다.(사진 최윤화 씨 제공)
▲적성초 독립기념비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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