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 서각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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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민’ 서각 장인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9.0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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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는 ‘서각’
순창 전통문화 사랑 ‘실천’

옥천사마제 현판, 삼인대 영ㆍ정조 관련 주련 등 서각

▲동전마을 평산재에서 성황대신사적현판을 발견하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서각(書刻)이란 나무나 돌 등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청동기ㆍ철기시대의 명문(銘文),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등 유적비에 새겨진 문자는 서각의 기원을 말해 주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사찰과 고궁의 현판(懸板), 주련(柱聯ㆍ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문구), 편액(篇額), 비각(碑刻) 그리고 서예의 한 행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순창에도 지역 문화재 전승에 노력해 온 서각 장인이 있다. 은파(隱坡) 노민(盧旼ㆍ순창읍 순화리ㆍ88세) 씨다. 
1932(실제는 1929)년 12월 30일 인계면 마흘리 대마마을에서 태어나 인계초등학교와 순창농고(현재 제일고)를 졸업하고 전매청(한국담배인삼공사)에서 30년 근무하고 퇴직한 1991년부터 묵묵히 순창 사랑 정신을 실천했다. 삼인문화선양회, 순창향지사,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 옥천사마영사회 등에서 활동을 하며 군내 수많은 문화재에 서각 작품을 남겼다. 

언제, 어떤 계기로 서각을 하게 됐는지요?

“아홉 살에 인계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마흘리 대마마을 서당에서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습니다. 6살 때 천자문을 떼었어요. 그때부터 서예에 푹 빠졌는데, 그게 독학하다시피 한 서각에 크게 도움이 됐어요. 전매청에서 퇴직한 후인 1991년부터 삼인문화선양회,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 등에서 일을 보며 본격적으로 서각을 하게 됐습니다.” 

30여 년 동안 서각하거나 쓰신 작품은?

“너무 많은데, 서각 작품으로는 먼저 옥천사마영사회ㆍ영사당ㆍ순창향교 장서각 현판이 있고요, 탄금정ㆍ도실정 현판, 금과 내동 송덕제 현판과 주련, 금과 동전 모의정 현판과 모의정기, 인계 정산마을 계산정각, 인계 심초 효자각과 효자비 등이 있습니다. 또 팔덕 청계 무선정 현판과 무선정기, 풍산 승입 오수정 현판의 글을 쓰고 판각했지요. 《옥천춘추》와 《순창향교모성회안》 표지서도 썼습니다.”  

옥천사마제 현판, 강암 송성용 글씨로 

전라북도에서 사마제가 규모 있게 유지되고 있는 곳은 순창 옥천사마제가 유일하다. 노 씨는 1998년 복원된 옥천사마영사회 사마재 현판 글씨를 강암 송성용(1913∼1999)을 찾아가 받아 판각으로 현판을 완성했다. 송성용은 한국서예의 독자적 경지를 이룬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유학자로 송하진 전라북도지사의 선친이다. “당시 강암 선생에게 글을 받으려면 백만원도 모자랐지요. 전주 양효섭 씨와 함께 선생을 찾아가 순창 선비정신의 맥을 잇고자 한다며 큰절 올리고 받은 글로 사마재 현판을 완성했습니다.”
순창향교 유양희 전교에 의하면 사마재 현판 글씨는 강암이 1999년 2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유작이라고 한다. 노 씨는 도실원 도실정((道實亭) 현판도 강암에게 글을 받아 서각했다. 

▲강암 송성용의 글씨로 서각한 옥천사마제 현판.

삼인대에 영조ㆍ정조 관련 주련 서각

그는 삼인문화선양회 창립과 삼인문화제(제1회부터 3회까지) 개최에도 동참했다. 시조경창대회ㆍ백일장대회 경비로 당시 사비 300만원을 운영비에 보탰다. 이때 영조와 정조가 삼인대에 내린 어필 편액을 동일한 내용으로 영조 관련 주련 2개와 정조 관련 주련 2개를 자비를 들여 광주에서 은행나무 판자를 구해 서각해 삼인대에 담긴 숭고한 뜻을 기렸다. 

성황대신사적현판 문화재 지정에 기여

일제강점기 말 이후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추진되면서 순창설씨 문중에서만 알고 있던 순창성황대신사적 현판이 대중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2년이었는데, 그는 여기에 크게 기여한다. 
“옥천향토문화연구소 설립 때 위원으로 참여해 고문서 수집 팀으로 활동했어요. 당시 도실계원으로 함께 활동한 금과 동전리 출신 설용선이 평산제에 옛날 현판이 있다고 해서 함께 갔어요. 그 현판을 당시 옥천향토연구소 민속자료 발굴팀장 조규동(曺圭東)과 옥천향토문화연구소로 옮겼습니다.” 
이후 고 양만정, 고 양정욱, 고 양상화, 고 조규동 등과 함께 현판을 연구하며 순창성황당을 조사했고 문화재 지정에 힘썼다. 

은파 노민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묵묵히 서각을 통해 순창 전통문화를 향한 사랑의 정신을 실천했다. 군내 곳곳에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그의 작업이 현판 또는 작품으로 전시돼 있다.

▲옥천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당시(왼쪽부터 노민, 김점식, 신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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