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7) 유등면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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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7) 유등면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0.2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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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등면은 순창군에서 발원한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다. 강천산에서 발원한 경천이 팔덕면과 순창읍을 거쳐 대동산 밑에서 양지천과 합류해 유등면으로 흐르고, 금과면에서 발원한 물도 풍산면을 지나 사천이란 이름으로 이곳에서 합류한다. 회문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도 치천과 일중천을 통해 섬진강에 합수한다. 그리고 섬진강(적성강)은 적성면을 지나 유등면 중앙을 휘감고 흘러간다. 유등면에는 아름다운 섬진강이 흐르고 물가에서 잘 자라는 버드나무가 많아 여러 누정이 있었다. 

 

강정(江亭)

영ㆍ정조 때 문신이었던 최경악(崔景岳)이 부모상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지낼 때 심신을 달랬던 곳이다. 화탄리에서 무수리로 가는 섬진강변, 현재의 화탄 양수장이 있는 곳에 있었다. 누정은 사라지고 없지만 누정이 있었던 주변을 지금도 강정코(鼻)라 한다. 
최경악은 1727년(영조 3) 유등면 화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충청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두루 거쳤다. 1804년(순조 4)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정조에게 상소를 올려 정조가 비답(批答ㆍ임금이 상주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의 대답)을 내린 바 있다. 상소 내용은 ‘첫째 성학(聖學)이 드러나는 사실이 없음이며, 둘째 상하(上下)가 신뢰하는 것이 부족함이고, 셋째 군신(君臣)이 일을 맡아 함에 실제가 없음, 넷째가 인재(人才)를 거두어 쓰는 것이 부족함, 다섯째 생민(生民)을 보호하는 일의 실제가 없음, 여섯째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부족함, 일곱째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함이 부족하다’였다. 

고반정(考槃亭)

임양직(林養直)이 유등면 섬진강 변 산기슭에 지어 소요처로 삼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1957년에 편찬한 《순창군지》에 전하고 있다.
‘고반’(考槃)은 《시경》 ‘위풍’(衛風)에 “은거하는 곳이 시냇가에 있으니, 큰 사람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어 말하나, 길이 잊지 않기로 맹세하도다”라고 했듯이 선비가 산림에 은거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을 의미하는 말이다. 

세심정(洗心亭)

고령신씨 15세손 유계당공(柳溪堂公) 신계(申桂ㆍ1600∼1656)가 적성강변 화탄(오교리 농업용수 취수장) 부근에 세웠다는 누정이다. 
신계는 이곳에서 인근 유림들과 시문을 즐기며 지냈다. 어느 날 회오리바람이 일어 누정 주위에 심은 꽃나무의 꽃잎이 떨어져 강물 위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마을 이름을 저탄(猪灘)에서 화탄(花灘)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송천당(松泉堂)

최한식(崔漢植)이 1900년경 화탄리에 지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송천정사라고도 했다. 금옹(錦翁) 김원중(金原中)이 쓴 제액(題額)과 근암(近庵) 박인(朴寅)의 명문(銘文)이 있다. 1935년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 지난 2003년에 전주최씨 종중에서 그 자리에 재실 만성재(晩聖齋)를 세웠다. 

▲송천당이 있던 곳에 세운 만성재.

어은재(漁隱齋) 

이정주(李廷柱)가 산과 물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고자 화탄리에 세웠던 소요처다. 그가 지은 시가 있다. 
“이 터에 재실을 짓고 고기 잡아 숨으며, 성(誠)을 살피고 마음을 넓히니 비로소 처음이 일어나네. 그물을 들어 낚시를 던져 신선의 맛을 얻으니 이웃의 갈매기와 백로와 함께 세상 물정을 멀리하네. 숨겨진 발자취 나타나지 않고 이 일에 편안하니 어진 마을에 중요한 것을 사는 곳에 걸었네. 세상의 티끌 덧붙이지 아니한 청청한 땅에 강호의 일락이 다시없는 것 같네.”

어초정(魚樵亭)

평택임씨(平澤林氏) 어정(漁汀) 임종주(林棕周)와 초봉(樵奉) 임한주(林漢周) 형제가 우애하며 담락(湛樂ㆍ오래도록 즐김)하기 위해 1929년 4월에 유촌마을 남쪽 섬진강변에 세웠다. 자기들 호의 첫 글자를 따서 어초정(漁樵亭)이라 불렀다. 
임한주가 이곳에서 읊은 시에 “작은 누정 늦게 얻어 유유자적 하는 곳과 이웃하여 고기 잡고 / 땔 나무 함을 일삼으니 성시의 티끌을 멀리 하네”라고 했듯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삶을 즐겼던 곳이다. 
현판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왕(義王ㆍ의천왕) 이강(李堈)의 친필이라 한다. 누정 안에는 이파(二坡) 장용일(張鏞一), 난포(蘭圃) 양경수(梁慶洙) 등이 지은 제영시(題詠詩)가 있고, 경암(敬菴) 김교준(金敎俊ㆍ1883∼1944)도 <어초정기>(漁樵亭記)를 남겼다.
어초정이 있는 유촌리 일대는 아름다운 섬진강이 흘러 예부터 풍류를 즐기는 유람객이 많았다, 선조 때 풍류객 백호 임제도 16세까지 지냈던 외가(옥과)에서 가까운 이곳 강가에서 많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한다. 
어초정 주변 바위에는 조대와 누정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적성강에 노니는 은어를 잡는다는 뜻의 낙정조기(樂亭釣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흥선대원군도 야인 시절 이곳 주변에 들러 낚시했다는 낚시터 상석이 전해온다. 
어초정 주변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음력 4월 12일이면 관찰사를 비롯해 순창ㆍ남원ㆍ임실ㆍ담양ㆍ곡성 등지에서 유학자 100여 명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시와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어초정.

온진정(蘊眞亭)

조선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청백리(淸白吏) 신공제가 세웠다. 이천(伊川) 언덕 위에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 《여지지》, 1766년(영조42) 이후 편찬된 《순창군읍지》에 기록 돼 있다. 누정 이름에서 ‘참된 마음을 쌓아가는(蘊眞ㆍ온진)’ 은자(隱者)처럼 조용히 살고자 했던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신공제(申公濟ㆍ1469∼1536)는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다. 자는 희인(希仁), 호는 이계(伊溪)다. 할아버지 신말주 밑에서 글을 배우고 글씨를 연습했다. 과거에 합격해 할아버지 곁을 떠나 서울 등지에서 벼슬살이하다가, 신말주가 노환이 들자 그를 간호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 능성(화순 능주) 현령으로 내려왔다. 능성과 순창의 거리가 가까워서 현감 신공제는 순창에 자주 와서 할아버지를 돌봤다. 1503년(연산군 9) 신말주가 사망하자 신공제는 능성현령을 사임하고 순창에서 3년 동안 여묘(廬墓) 살이를 했다. 그때 누정을 지어 ‘온진정(蘊眞亭)’이란 편액을 내걸고서, 스스로 이계주인(伊溪主人)이라 했는데, 호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유등 소재지 앞을 흐르는 물을 ‘이계천’이라 한다. 
후손인 여암 신경준이 영조의 상이 끝나자 남산마을로 낙향해 8대조 신공제가 지은 온진정을 중건하고 <온진정중건기>(蘊眞亭重建記)와 <온진정팔경>(蘊眞亭八景)을 남겼다. 
<온진정중건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누정은 순창 동쪽 십 리 되는 언덕 위에 있으니 돌이 쌓여 대를 이루었다. 대 아래 큰 바위가 울퉁불퉁 벌려 있으며 옅은 물은 동으로 흘러 천여 보 거리다. 물 가운데 바위 위에 큰 글씨로 ‘고반어은 음풍영월’(考槃漁隱 吟風詠月ㆍ소요 자적하며 고기 잡고 숨어 살며 풍월을 읊다)이라 새겨졌으니 글자 형태가 특이하다. 그 나머지는 물이 깊어 다 알아보지 못하고 흰 모래 멀리 물가에 가득하다.” 
당시에는 섬진강 나룻배가 온진정 앞까지 들어오기도 했으며 경치가 아름다워 인근 시객들이 풍물놀이와 뱃놀이 등을 즐기면서 담화를 나누기도 했다. 특히 온진정 앞 강가 모래가 가늘고 아름다워 보름달이 뜰 때면 배를 띄우고 시흥으로 화답하며 즐겼다고 한다. 
외이리 주민들은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온진정에 모여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을 다섯 번 돌면서 농악을 치고 제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는 풍습을 1970년대까지 이어왔다. 온진정은 세월이 흘러 터만 남아 있었는데 2019년에 외이리 섬진강변에 복원되었다. 

▲온진정(복원된 모습).

정금대(停琴臺)

유등면 건곡리 마을 뒤 정자나무가 있는 곳을 ‘정금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 일대는 고려 사직이 무너지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켰던 선비들이 많았던 곳이다.
조선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정몽주, 설장수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조원길(趙元吉)은 순창으로 낙향했다. 다섯 아들 중에 큰아들 조영(趙瑛ㆍ1344~1428)도 함께 순창으로 낙향했다. 조영은 태종이 이조판서, 세자사부(世子師傅)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아 태종으로부터 부자삼현(父子三賢)이란 칭송을 들었다. 
스스로 낙재라는 호를 짓고 정금대에 올라 고려의 옛 서울 개성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뜯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비유하고, 그가 노닐던 산을 정금봉(停琴峰)이라 했다. 
조영은 정금대에서 유유자적하다 1428년(세종 10) 일생을 마쳤고, 옥천조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다음은 그가 정금대에서 지낼 때 지었다는 시다. 

백운지아심 (白雲知我心) 저 흰 구름 내 마음 알거나 
성산여고인 (靑山如故人) 청산만이 옛 사람과 같구나 
욕설망국한 (欲說亡國限) 나라 잃은 슬픔 말하려니 
운산묵사돈 (雲山墨以頓) 구름 낀 산이 찡그리네

▲건곡마을 정금대 터.

옥호정(玉壺亭) 

유촌리(유등면 유등로 627-32)에 멋진 누정이 새로 들어섰다. 
옥호정은 원래 전남 곡성군 곡성읍 묘천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악정(嶽亭) 신근(申根) 등 10명이 힘을 합쳐 춘현하송(春絃夏誦ㆍ학문에 힘씀)의 뜻으로 시계(詩契)를 조직해 1895년에 지었다고 한다. 당시 곡성현감인 창애(蒼崖) 이문영(李文栄)이 옥호청빙(玉壷清氷), ‘옥항아리에 담긴 맑은 물이 얼음이 될지언정 군자처럼 고결한 지조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를 취해 옥호정(玉壷亭) 이라고 누정 이름을 지었다. 1983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형 팔작지붕의 대청형으로 중수(重修) 했지만 태풍으로 크게 피해당하고 보존상태가 매우 불량한 상태로 방치되었다. 
김관중 초연당(유등면 유촌리 소재) 대표가 2019년, 무너져 폐정 상태에 있던 누정을 매입해 해체하고 현 위치에 2층 누각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개축된 유촌리 소재 옥호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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