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14) 복흥면 동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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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14) 복흥면 동산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1.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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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14)

옛 복흥현 치소가 있던 동산리(東山里)는 복흥면 북쪽에 위치한다. 마을 입구에 5000여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이 산재한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의 대유학자 노사 기정진, 아름다운 축령산 편백나무숲을 장성군민에게 선물한 한국 조림의 선구자 임종국(林種國), 우리나라 수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김우권(金宇權) 전 전남대 수의대 학장 등이 배출된 곳이다. 2020년 11월 16일 기준 인구는 80가구, 160명(남자75명, 여자85명)이다. 자연마을로 안산마을이 있다.

 

마을유래

마을 이름은 원래 조동(槽洞)이었다. 조동의 ‘조’는 ‘구유 조(槽)’자다. 마을 형상이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인 구유처럼 생겨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구실’이라 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실(조동)과 안산리, 궁산리를 병합하고, 옛 마을 이름 중 ‘산’ 자만 따고 ‘동’ 자를 붙여 동산리(東山里)라 했다.
자연마을인 안산리는 동산리 서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안산(案山)’이라 표기하지만, 옛날에는 지형이 말의 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안산(鞍山)’으로 표기했었다. 

▲동산리 전경.
▲안삼마을 전경.

복흥현과 관련된 기록

《고려사》 57권 지11 지리2 전라도 남원부에 “순창군은 원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와서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현으로 만들어 본부(남원부)에 소속시켰다. 1314년(충숙왕 1) 승려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옥천(玉川) 또는 오산(烏山)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소속 현에 복흥현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남원도호부에 “순창군의 별호는 옥천, 또는 오산이라 한다. 옛 속현(屬縣)이 둘이니 복흥(福興)과 적성(赤城)이다”라고 기록하여 복흥현이 예부터 순창군의 소속 현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순창군 치소(治所)는 원래 현재의 순창 읍내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순화(淳化) 때의 옛날 치소가 복흥산 아래에 있다. 순창현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치소가 복흥으로부터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라고 하였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도실(道實)이 백제의 옛 군임을 생각하면 오산과 옥천의 명칭은 마땅히 신라 통합 전에 있어야 한다. 지금 향교 뒤에 오산이 있는 바, 곧 오산현의 옛터이며 군의 서쪽 1리(약 0.39킬로미터)에는 옥천동이 있는데 곧 옥천현의 옛터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 흥폐(興廢)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순창의 치소는 원래 신라의 순화군 때부터 고려의 순창현 때까지 현재의 복흥면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지역에서는 동산리 옛 조동(구실마을)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순창현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치소가 복흥에서 오산 또는 옥천으로 이동함에 따라 지명도 순창으로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다.

당산제

동산리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면 할머니 나무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동산리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날 밤 자시(子時)에 마을 수호신인 당산 할머니와 성황신께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다. 당산제를 모실 때는 조탑(성황지신) 앞에서 풍물을 치면서 시작해 마을 가운데 있는 당산나무(당산 할머니)로 성황신을 모셔 들여와 한꺼번에 제사를 지낸다. 
동산마을 제당은 2013년 현재 두 군데다. 마을 입구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조탑과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당산나무가 그것이다. 조탑의 신격(神格)은 ‘성황신’이며 당산나무의 신격은 ‘당산 할머니’다. 하지만 본래 동산마을 제당은 세 군데였다고 한다. 마을 입구 왼쪽 논 가운데에 있는 조탑과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당산나무, 거기에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배를 만든다고 하여 일본인들이 마을 입구 당산나무(성황지신)를 베어 버렸고, 그 뒤로 조탑이 ‘성황지신’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산 할머니’인 당산나무 수종은 느티나무로 수령은 6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전라북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원래 나무 둘레의 삼분의 이 정도가 타버려서 그 부분은 시멘트로 메워져 있는 상태다.
이러한 동산 당산제도 한국전쟁 직후와 새마을운동 당시에 미신 타파의 분위기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 당산제를 모시지 않던 동안 마을에 교통사고가 자주 나는 등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자, 1980년대에 마을회의에서 당산제를 지내기로 했다. 마을 제사를 다시 모시자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마을 노인들도 아픈 사람이 적어졌다고 한다.

▲당산제 모습.

고인돌과 구슬 공덕비 떼

동산마을 어귀, 지방도 49호선(복흥면 소재지와 정읍시를 잇는 도로) 바로 건너 남동쪽 밭에 1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굄돌은 확인되지 않고 남북으로 장축 방향을 두었으며 덮개돌은 길이 410센티미터(㎝), 너비 230㎝, 두께 100㎝다. 1982년 전북대학교박물관과 1989년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주관으로 이루어진 지표조사에 의하면 모두 13기의 고인돌이 지방도 49호선과 동산저수지 사이 밭에 무리 지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농지정리사업을 하면서 12기의 고인돌이 유실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슬 공덕비 떼는 현감이나 군수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원래 마을 옆 관아 터에 있던 것들이다. 현감 송덕비군(縣監頌德碑群)이라고도 한다. 동산리 고인돌 1호 상석 위에 있다. 현감 비 1기와 군수 거사비 3기 등 총 4개의 비가 세워져 있다. 금석문은 오른쪽으로부터 ‘군수 이후 도헌 거사비(郡守李候度憲去思碑)’, ‘군수 조후 ○○○○○(郡守趙候○○○○○)’, ‘군수 ○공 재희 거사비(郡守○公載僖去思碑)’라 쓰여 있다. 

▲동산리 고인돌과 구슬 공덕비 떼.

동산저수지

수면적 5만2000평의 반계곡형 저수지다. 내장산과 백양사 사이에 있고, 교통로가 좋아 접근이 쉽다. 물이 맑고 깊으며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특히 가을철에는 단풍과 코스모스로 인해 눈이 즐거운 곳이기도 하다. 해발 300미터 고지에 있어 낚시 시즌이 늦게 시작되고 일찍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동산저수지.

기정진 유허비와 시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ㆍ1798-1879)은 조선시대 6대 성리학자로 꼽히는,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이다. 19세기 중반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우며 출현한 서구열강 앞에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위정척사(衛正斥邪) 논리를 최초로 설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주창한 위정척사사상은 봉건적 전통질서를 옹호하고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나 구한말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항일의병 활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기정진은 1798년(정조 22) 6월 3일에 복흥면 조동(현재 동산리)에서 아버지 기재우와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양친을 거의 동시에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선대의 고향인 전남 장성군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가 태어난 곳 부근인 육모정 앞에 지난 2003년 7월 2일 유허비와 시비가 세워졌다. 높이 1.8미터의 유허비엔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시비엔 그가 8살 때 지었다는 한시 <내장산>을 새겼다. 

▲기정진 시비와 유허비.

기정진 출생 설화

다음은 순창이 배출한 대유학자 노사 기정진이 한쪽 눈을 잃게 된 일화다. 
기정진의 아버지 기재우는 전남 장성 하남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인 태온(太溫)에게 의지해 살았다. 그는 부모도 없이 불행한 유년을 보냈으나 현실에 굴하지 않고 틈틈이 글을 읽었다. 《소학》을 읽으면서 부모에게 효행을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자신이 효를 행할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유골이나마 좋은 곳에 모시는 것임을 깨닫고 풍수지리를 공부해 풍수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 유골을 모실 곳을 찾던 중 복흥에 대혈(大穴)이 많은 것을 알고 복흥 조동(현 동산리)으로 이사했다. 
기재우는 풍수지리학상 길지라고 하는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에 부모를 모시게 되었다. ‘황앵탁목혈’이라는 묘지 풍수는 그 명당에 묘를 쓰면 3대손이 복을 받게 된다는 혈자리인데, 특히 3대 후손 중에서 한쪽 눈이 없는 아이가 태어나야 명당 발복이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후 10년 후에 노사 기정진을 얻게 된다.
기정진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 기재우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녀에게 “딸이냐, 사내냐”라고 물었다. 하녀는 “옥동자입니다” 하였다. “아무런 탈이 없더냐?”라고 다시 묻자 “아무 탈이 없는 옥동자입니다”라고 하녀가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기재우는 사랑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두문불출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권 씨 부인은 안절부절못했다. 40이 넘어 아들을 낳았으니 칭찬을 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남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남편의 내심을 모르는 처지에서 부인의 마음은 편안할 수가 없었다.
아들을 낳은 후 7일이 된 날 아침, 초이레에 삼신에 제사하기 위해 방 청소를 하던 하녀가 그만 잘못해 벽에 걸어 놓은 가락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아기의 눈에 떨어졌다. 아기가 죽을 듯이 울어대자 사랑방에서 두문불출하던 기재우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녀는 죽어 가는 목소리로 아기가 눈을 다쳤다고 했다. 그러자 7일간을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기재우는 사랑방 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며 “이젠 됐다. 별일 없을 것이니 조용히 하라”라고 말하고는 희색이 만면했다. 이 모습을 본, 부인은 기가 막혔다. 두문불출하던 남편이 아기를 낳은 지 7일 만에 나와서는 눈을 다친 아기를 보고는 아무 일도 없으니 조용히 하라고 하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재우로서는 30년 고생해 황앵탁목혈을 구해 어머니께 효도했다는 기쁨과 그 결과로 한쪽 눈이 먼 자식을 얻었으니 그 이상 기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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