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09) 팔덕면과 풍산면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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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09) 팔덕면과 풍산면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1.2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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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대.

● 팔덕면 누정


무계정(武溪亭)

팔덕면 청계리 무이산(武夷山) 아래 있었다. 박정식(朴正植)의 소요처였고, 사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이 지어 지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석촌(石村) 윤용구가 현판을 썼다. 1935년 편찬한 지리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남아 있어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삼인대(三印臺)
 
팔덕면 청계리 강천사 앞 내 건너 남쪽에는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 이후 폐위된 왕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위해 세 사람이 관인(官印)을 걸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 곳이다.
1744년(영조 20)에 홍여통ㆍ윤행겸ㆍ유춘항 등 순창군 선비들이 발기해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비문을 짓고, 정암(貞庵) 민우수(閔遇洙)가 비문 글씨를 썼으며 지수재 유척기가 전서(篆書)를 썼다. 
중종반정을 주도해 성공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을 중종의 비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해 중종에게 폐비를 강요했다. 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중종은 신 씨를 폐출하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 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장경왕후 윤 씨는 왕자를 낳고 결혼한 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에 사망했다.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 세 사람은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에 모여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비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의 인장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이곳이라 하여 삼인대(三印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신 씨 복위 상소가 올라가니 조정에서는 반정공신들이 나서서 이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려 했다. 
정광필(鄭光弼)이 강력히 말려서 목숨은 건 질 수 있었으나, 김정은 함림역으로 박상은 오림역으로 유배되었다. 김정은 4년 후인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521년, 나이 35세에 사사(賜死) 되었다. 유옥(柳沃)은 복위 상소로 인한 화는 면했지만 얼마 후에 병으로 죽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도암(陶庵) 이재(李縡ㆍ1680~1746)는 삼인대 비문에서 “이 대(臺)는 바위와 시냇물의 좋은 경치가 있어서 고금에 많은 고관대작이 다녀갔지만, 안개와 구름이 눈을 스쳐 지나가듯 가버리고 오직 세 선생의 풍도(風度)만이 늠름하게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는 것은 어찌 군신ㆍ부자ㆍ부부의 윤리가 천지의 변함없음과 같이 영원토록 무궁함이 아니겠는가”하고 적고 있다.
삼인대는 지난 1963년 이후 몇 차례 보수하고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ㆍ관리하고 있다.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에는 삼인대 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해 비각 옆에 새 비석을 세웠다. 군민과 김정 등 3인의 후손이 삼인문화선양회를 구성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월연대(月淵臺)
 
전국 어느 사찰에서나 외지 방문객을 위해 반드시 누정을 지었는데, 강천사 주변에 있던 누정 월연대도 그런 목적으로 지어졌다. 임억령, 김인후, 노수신(盧守愼), 박상, 최문리(崔文理) 등 유수한 문인들이 강천사(剛泉寺) 일대를 방문해 시를 남겼다. 다음은 하서 김인후가 월연대에서 지은 시다. 

산중에 한 차례 비가 내리니 山中一雨過(산중일우과) 
누각 앞 시냇물이 푸르러졌네 樓前溪水碧(루전계수벽) 
바위 위의 해는 서쪽으로 지려하고 巖高日欲西(암고일욕서) 
고목의 키는 백 자가 넘는구나 古樹長百尺(고수장백척) 
스님들은 방문객을 배웅하려고 僧徒送行客(승도송행객) 
짝지어 물가에 앉아 있노라 兩兩坐溪石(량량좌계석) 
손잡고 벗과 작별하면서 握手謝留伴(악수사류반) 
잔을 가득 채워 아낌없이 마신다네 杯深傾不惜(배심경불석)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이 寒風何處來(한풍하처래)  
홀연히 두 빰을 훔치는구나 颯颯掠雙頰(삽삽략쌍협) 
낙엽은 오솔길을 파묻고 落葉没前徑(락엽몰전경) 
군데군데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도다 蒼蒼間松竹(창창간송죽)
한껏 취해 돌아가려니 一醉歸去來(일취귀거래) 
새소리가 빈 골짜기를 울리네 幽禽響空谷(유금향공곡)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ㆍ1574~1656)도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며 순시차 월연대에 올라 시를 남겼다.

어젯밤 비를 바람이 몰아가고
가벼운 그늘이 동구를 막고 있네
깊은 산 가을은 깊어지고
땅이 갈라졌는지 누대는 멀기도 하네
기대에 찬 중천의 학이런가
무심히 산을 넘는 구름이런가
속세 인연 잊은 지 이미 오래라서
새와도 짐승과도 잘 어울린다네

홍화정(弘和亭)

강천사 부근에 있었다. 또한 강천산 병풍바위와 강천사 사이, 즉 금강문 올라가는 입구 개울 건너에는 광덕정이 있었다. 두 정자 모두 1976년 세워 1990년대까지 관광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사랑받았는데 언제 해체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홍화정-조순엽 제공.

● 풍산면 누정

 

▲향가유원지 전경. 놀이터 부근이 백수정와(호호정)가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모로정과 호정이 있던 유정리 전경.

 

동대(東臺)

설희천(薛希天)ㆍ희성(希聖)ㆍ희진(希進) 3형제가 우애하며 지낸 담락지소(湛樂之所)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담락(湛樂)‘이란 말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녹평(鹿鳴)편에 나오는 구절 ’화락이담‘(和樂而湛ㆍ화락함이 끝이 없네)의 준말이다.

모로정(毛老亭) 
 
조선 전기 문신 조구령(趙九齡ㆍ1484~1528)이 예문관 검열과 교수를 지내다 부모의 병환으로 낙향해 유정리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짓고 지냈던 곳이다. 

백수정와(白水精窩)와 호호정(皡皥亭)

순창사람들은 순창군을 흐르는 섬진강을 적성강으로 불렀고, 전남 곡성군 사람들은 부근을 흐르는 섬진강을 순자강(鶉子江)이라 했다. 옥출산이 있고 섬진강이 지나는 풍산면과 곡성 일대에도 수많은 명사가 안락처 누정을 지었다. 그 중 대표적인 누정이 풍산면 향가리 옥출산(玉出山) 기슭 순자강변 호호정(浩浩亭)이다. 
호호정의 원래 이름은 백수정와(白水精窩)였다.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ㆍ1700∼1767)가 벼슬의 뜻을 버리고 옥출산(玉出山) 자락 백호(白湖, 현재의 향가유원지 부근으로 추정) 변에 1741년(영조17)에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한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100년 넘게 서울 관원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유림(儒林)의 집합소 역할을 했다고 한다. 
양응수(楊應秀ㆍ1700∼1767)는 순창 출신 대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일명 백수공(白水公)으로 자는 계달(季達)이다. 어릴 때는 순창에 살고 있던 화산(華山) 권집(權緝)에게서 배웠고, 38세 되던 해 경기도 용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 도암(陶菴) 이재(李縡)에게 배웠다. 원래 적성면 서림리(西林里)에서 태어나 살다, 풍산면 향가로 이주한 뒤 백수정와를 짓고 후학을 배출했다. 53세에 특별 천거로 건원릉 참봉에 제수 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익위사부솔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 55세 나이로 호남 암행어사에 의해 경술과 학행으로 천거됐다. 1808년(순조 8) 사림들의 건의로 적성면 지계서원(芝溪書院)에 그의 선조 양배(楊培)와 함께 향사했다. 1928년 순창에 있는 후손들이 《백수 선생 문집》을 간행했다. 
놀이터 부근이 백수정와가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부구루(浮丘樓)

죽곡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진사 설장영이 지었다. 설장영은 인조 때 사람으로 일찍이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하지 않고 은거했다. 자신의 호를 따 누각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노년에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많아 이 누각에서 사우들과 한가한 여생을 즐겼다.

죽사정(竹史亭)
 
풍산면 대가리에 유도의(柳道銥)가 지어 지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호남문화연구》 23집에 전하고 있다.


태암(台庵)
 
풍산면 삼태봉 기슭에 조택규(趙澤奎)가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소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1957년에 발간한 《순창군지》에 전하고 있다.

호정(湖亭)

풍산면 유정리에 조정빈(趙廷賓ㆍ1623∼?)이 지었던 소요처였다. 조구령(趙九齡)의 누정 모로정(毛老亭) 뒤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1957년에 편찬한 《순창군지》에 전하고 있다. 조정빈은 순창 출신으로 1684년(숙종 10)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 바로 잡습니다.
514호 ‘인계ㆍ적성면 편’에서 계산정과 어은정 사진이 서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찬하정(餐霞亭) 주인 양항(楊沆)은 귀암(龜巖) 양돈((楊墩)의 후손이 아니라 양배(楊培) 후손이라고 양표영 독자께서 알려왔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 팔덕ㆍ풍산면 편을 끝으로 <순창 누정을 찾아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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