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15) 쌍치면 학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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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15) 쌍치면 학선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0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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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15)
천주교 성지ㆍ국사봉 철쭉제의 고장

학선리는 쌍치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북쪽으로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동쪽으로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남쪽으로 쌍치면 종암리, 서쪽으로 정읍시 쌍암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과거 ‘하치등면’ 가마실(부정리)ㆍ밤실(율리)ㆍ승어실ㆍ외양실ㆍ오룡ㆍ반룡촌 마을로 이루어졌다. 쌍치 12실 가운데 4실을 포함한다. 정읍 태인면 남촌과 굴치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학선리에 편입되었다. 1971년 행정 개편 때 부정ㆍ오룡ㆍ입신 3개 행정리로 재편했다.  2020년 11월 30일 기준 학선리 인구는 41가구, 66(남자 25, 여자 41)명이다.

 

입신마을

입신(立新)마을은 승어실(升魚室)과 외양실(外陽室) 2개 마을이 있었다. 승어실을 큰댁, 외양실을 작은댁이라 하다가 1971년 합해 입신마을로 부른다.
이 마을은 순창군 최북단, 가장 골 깊은 곳에 있으며 군계(郡界) 분기점 밑에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외양실에는 와우형(臥牛形)의 대명당이 있고, 숭어실에는 유어승탄형(遊漁升灘形)의 대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렇게 명명되었기에 옛 선비들이 이곳을 찾고 정착해 은거 생활했다 한다.

▲입신마을 숭어실.
▲입신마을 외양실.

부정마을

부정(釜井)마을은 가마실이라고도 하는데, 쌍치 12실 중 하나다. 마을을 둘러싼 옥녀봉과 부엌골, 함박골을 포함하는 산세가 가마솥 형국이어서 부정(釜鼎)으로 명기(名記)하다, 1971년 분리 시행 때 부정(釜井)으로 명기하게 되었다. 지금은 작은 마을이지만 한때는 60여 호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부정마을 전경.

오룡마을

오룡(五龍)마을은 마을터가 풍수설로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다섯 마리 용이 마을 옆 동산을 여의주로 여기고 다투는 형국이라고 한다. 
산중에 있는 쌍치면에서도 가장 깊숙하게 산속으로 들어와 있는 마을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교우들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몸을 숨겼던 곳이다. 마을 옆 동산 앞에 시멘트 봉분의 천주교 신자 묘소가 있고 마을 위에는 낡은 오룡공소가 있으며 지금도 천주교 신자가 많이 산다. 오룡마을 주변에 밤실(율리)ㆍ반룡촌(굴치)ㆍ치곡등ㆍ국동 등 마을이 있었으나 거의 옛터만 남았다.

▲오룡마을 전경.

천주교 성지 오룡공소

공소(公所)란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을 말한다. 한국 천주교는 신도들에 의해 천주교회가 창설됐는데, 사제 없이 60여년 동안 극심한 탄압을 견딜 때 공소는 신앙의 터전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쌍치면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다. 쌍치면에는 한때 다섯 곳의 공소가 있을 정도로 천주교가 번성했던 곳이다. 병인박해(1866) 때 우리나라 12명 신부 중 9명이 살해되었고 불과 수개월 사이에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충청도와 부안 변산 등으로 많이 피신했는데 더 안전한 피난처를 찾다가 오지 중의 오지였던 쌍치면 학선리 오룡마을로 모였다. 그때 형성된 교우촌이 지금의 오룡마을이며, 오룡공소를 모태로 광주대교구가 생겼고 쌍치공소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1889년에 베르모렐 신부가 오룡촌 공소를 설립했고, 1918년 12월 오룡마을에 15칸 오룡촌 공소 건물을 짓고,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매괴(붉은 꽃, 즉 장미를 뜻함)의 성모’를 수호자로 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1929년 정읍 능교리 본당의 주임 김창현 신부가 집전한 가운데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가 오룡촌 공소에서 열렸다. 당시 고해성사자는 600명, 성체성사자가 300명이었다. 미사 전날 청년들이 ‘선종 선종 악행악종’이라는 성극을 공연했는데 1000여명이 관람할 정도로 교우 수가 많았다고 한다. 
오룡공소는 지금도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인정받는다. 공소와 숙소가 한국전쟁 때 소실되자 1957년에 다시 지었다. 쌍치면 소재지에 성당이 새로 생기면서 성도들이 모두 소재지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드리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오룡공소.
▲마리아상.

국사봉 철쭉제

쌍치면 진산인 국사봉(國師峰)은 쌍치면 학선리와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해발 655미터의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고당산, 서남쪽으로 내장산, 남쪽으로 추월산과 강천산, 동남쪽으로 회문산, 여분산, 세자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임금과 신하가 조회하는 군신봉조(君臣奉朝)의 풍수지리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3정승과 6판서는 세자를 어진 임금이 되도록 가르치는 스승이기 때문에 임금의 스승인 산, 즉 국사봉(國師峰)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섬진강 상류이자 쌍치면 젖줄인 추령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어 풍수지리의 이상적인 모델을 모두 갖춘 길지다.
국사봉은 자연환경과 기후 조건이 철쭉 번식에 적합한 곳으로 야생 산철쭉이 1.7킬로미터에 걸쳐 군락을 이룬다. 특히 연분홍 자생 철쭉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100~200년 이상 된 토종 야생 산철쭉이다. 5월 초순이면 형형색색의 철쭉들이 장관을 이룬 국사봉 자락에서 철쭉 축제가 열린다. 국사봉 서쪽 철쭉제 행사장이 있는 터실과 귀신폭포, 철쭉 2군락지가 있는 승어실에는 온갖 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며 사진작가와 등산 동호인의 발길이 이어진다.
국사봉 철쭉제는 2001년부터 매년 쌍치면면민회 주관으로 주민자치위원회 등 각 사회단체가 주축이 되어 치러지고 있다. 풍물놀이를 시작으로 산신제, 판소리를 비롯한 여러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펼쳐져 관광객에게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국사봉 철쭉 모습.

굴치와 박잉걸 초상화ㆍ치도비

굴치(屈峙) 또는 굴재는 쌍치면 학선리 오룡마을과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를 연결하는 고개다. 옛날에는 이 고갯길이 순창과 정읍을 연결하는 큰길로 많은 사람이 왕래했다. 모양이 굴같이 생긴 굴재는 《동국여지지》 태인 조에 “굴령(屈嶺)은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동으로 운주산에 접하고 남으로는 정읍의 내장산에 연결되어 있다. 길이 깊고 바위가 험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룡마을에서 마을회관을 지나 시멘트 길로 계속 올라가면 긴 하우스가 나온다. 하우스 끝나는 곳이 굴치 정상인데 여기서 흙길로 300m정도 내려간다. 앞에 산이 막힌 갈림길에서 오른쪽 계곡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순창과 정읍 경계 지점에 거대한 바위 2개가 서 있다. 주소는 쌍치면 학선리 산 276번이다. 하나는 옛날 어느 여인이 치마에 쌓아다 놓았다는 전설의 치마바위고, 그 바위 앞에 거의 같은 크기의 바위가 서 있다. 높이 5.6미터 가량, 둘레 10여 미터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박잉걸(朴仍傑)의 적선을 송덕하는 초상화가 새겨져 있고 초상화 밑으로 치도비(治道碑ㆍ굴치 고갯길을 닦은 일을 기념하는 비)가 암각(岩刻)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박인걸의 얼굴을 조각했다고 하나 바위 전체가 이끼가 자라 옷주름 같은 모양은 확실하게 나오는데 얼굴 있는 부분은 가늠할 수가 없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를 받쳤던 받침돌이 물살에 휘말렸는지는 몰라도 약 30도 정도가 냇가 쪽으로 기울었다. 큰 바위에는 비석이 2개 치석(治石ㆍ돌을 다듬음)되어 있다. “上之二十二年乙酉八月旌閭孝子密陽朴公仍傑慕隱堂乾隆十二年丙寅三月治道碑(상지이십이년을유팔월정려효자밀양박공잉걸모은당건륭십이년병인삼월치도비)”라 새겨져 있다. 명문 앞부분은 상지 22년(1885) 8월에 모은당 박잉걸이 효자 정려를 받았다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건륭 12년(1746) 3월에 길을 닦았다는 내용이다.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은 태인 고을 갑부였다. 1676년(숙종 2년) 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나 여러 분야에 걸쳐 자선사업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험한 고갯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 행려(行旅)에 덕을 쌓았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밥과 옷을 주었다.그가 이렇게 많은 개인재산을 들여 자선사업을 베풀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박잉걸은 열심히 노력해 큰 부자가 되어 부족한 것, 걱정할 것 없이 행복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말년에 병에 걸리게 되었다. 피부에 비늘 같은 것이 생기고 몸이 가려워서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박잉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의원을 찾아 치료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1745년(영조 21년) 초가을 어느 날이었다. 말을 타고 굴치재를 오르고 있었다. 고개 중턱에 이르러 쉬고 있다가 홀로 고개를 넘어오는 한 노승을 만났다. 노승은 멀리서 보기에도 선풍도골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쩌면 도를 깨친 노승인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순간, 노승이 박잉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감 신액(身厄ㆍ액, 불행한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 말을 들은 박잉걸은 귀가 번쩍했다. “도승은 이 사람에게 좋은 비방을 일러 주시오” 그러자 노인은 “중생에게 적선하시오. 우선 많은 사람이 다니는 이 험한 길을 닦으시오.” 그리고 도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갯길을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박잉걸은 깨달았다. 산신령의 계시라고 생각한 그는 가던 길을 되돌아서서 칠보면 백암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생을 건지는 자선사업을 하게 된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먼저 정읍 구절치 잿길을 닦았다. 
그리고 다음 해 이른 봄에는 쌍치와 정읍을 연결하는 이곳 굴치 길을 닦았다. 고개가 높아 비가 오면 패일 것을 염려해 바닥에 납작한 돌을 깔아 버선발로 걸어도 흙이 묻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마무리했다. 또한, 고갯마루에 움막을 지어 신발과 옷을 마련해 놓고 신발이 떨어진 사람은 신을 갈아 신고 가고, 옷이 해진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가도록 했다. 박잉걸은 이 외에도 태인 고을 곳곳에 많은 덕을 베풀었다. 
여러 적선의 은덕이었는지 박잉걸의 피부병은 말끔히 완치되어 90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박잉걸에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의 직을 제수했다. 태인현 사람들과 순창군 사람들은 굴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초상화를 새기고 수도비를 새겨 박잉걸의 공을 기렸다. 
기이한 일은 박잉걸이 죽은 해에 중국 청나라 고종이 태자를 낳았는데 6개월 동안이나 왼손을 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강제로 펴고 보니 손바닥에 “조선국 태인 박잉걸 환생”이라 쓰여 있어 청나라 사신들이 태인현까지 와서 확인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박잉걸 수도비가 서있는 길은 산과 평야를 연결하는 지점이고 순창에서 정읍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사람이 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었지만 길이 험하고 재가 길어서 이 고개에서 조난 당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박잉걸이 길을 닦은 후 이 길은 더욱 많은 사람이 편하게 지나다니는 길이 되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읍과 순창을 오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지금은 정읍과 쌍치를 잇는 길이 생겨서 이 길로 다니는 사람이 줄었고 다시 옛날처럼 험한 길이 되어있다. 계곡을 따라 있는 길은 박잉걸이 닦았을 법한 납작한 돌이 남아 있으나 이제는 거의 길이라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초상화ㆍ치도비가 새겨진 
바위.
▲박잉걸 치도비.
▲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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