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단오성황제,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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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단오성황제, 어떤 모습이었을까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6.1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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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55일 단오(端午)는 추석설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절이다. 이 시기는 파종이 끝나는 때와 맞물려,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삼한시대에 5월에 씨 뿌리고 난 뒤 하늘에 제사 지내던 풍습이 있었고 이를 수릿날이라 했다. 고려가요 동동(動動)에도 ‘55일 수릿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단오라는 명칭과 이념은 중국에서 전해졌지만 행사 내용은 토착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순창군은 세시풍속 문화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순창단오성황제를 복원하고, 문화유산으로 재현하기 위해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단옷날 순창에서는 성황제두룡정 물맞이응향지 그네뛰기단오난장 씨름과 투전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과거 순창 단오성황제 모습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았다.

 

순창 성황제의 변천과 의의

 

순창 성황제는 단오절 전후로 13세기 말 칭송받던 청백리 설공검을 성황대신으로 하고 산성대모를 성황대부인으로 신격화해 열렸던 제례행사다. 국가에서 관리한 국제관사(國祭官祀)로 중시되던 성황제는 조선시대에 유교식 삭망제로 바뀌었다가 조선후기에 다시 단오절에 시행되는 등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그러다가 향리 주도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성황제는 근대 이후 점차 무속인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점차 제의(祭儀)보다 단오 행사인 단오난장, 두룡정이 물맞이, 응향지 그네뛰기 등에 더 많은 인파가 몰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순창 성황사(순화리 옥천동)에는 사모관대를 착용한 남신상과 홍삼 족두리 차림 여신상의 목각상이 있었지만, 1940년 무렵 일제에 의해 성황사가 헐리게 된다.

1992년에 발견된 성황대신사적현판(국가민속문화재 제238)에는 13세기부터 700년간 순창 성황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순창 성황대신사적현판이 주는 가치는 성황제의 유래와 변천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옛 성황제의 모습을 되찾는 기회를 제공한다는데 있다. 단오절에 대모산성과 읍치 성황사, 그리고 읍치 내에서 지역민과 함께 베풀어졌던 성황제는 고려시대 이래 지방 행정구역이 어떻게 지역공동체로 유지전승되어 왔는지를 엿보게 해 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순창 성황제는 순창의 소중한 유산인 동시에 오늘날 순창이 되살려야 할 새로운 문화이다.

성황사 신상 복원 배치도
성황사 신상 복원 배치도
성황사가 표시된 〈환유첩〉 순창군 지도
성황사가 표시된 〈환유첩〉 순창군 지도

 

단오난장

 

단오난장은 음력 5월 초하루부터 5일까지 닷새간 열렸다. 단오난장 터는 순창시장 입구, 지금의 군내버스 종점 부근이었다. 단오난장 부근에는 포목전과 싸전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단옷날이 다가오면 단오제전위원들이 단오제에서 쓸 비용을 마련하는 걸립을 했다. 추진위원들이 사전에 시장상인들에게 단오제를 한다는 문서를 돌리고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며, 농악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걸립을 했다.

추진위원들과 농악대가 점포에 들어서면 상인은 쌀을 말에 가득하게 담아 내놓고 말쌀 위에 촛불을 켜 놓는다. 그러면 농악대는 장사 잘되라고 축원해 주는 굿을 쳐 주었다. 돈을 내는 집도 있었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은 쌀을 내놓았다. 십시일반으로 곡물을 성금으로 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포목전과 싸전, 잡화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내놓았다. 포목전 상인들은 씨름판을 조성하기 위해 장년씨름판에 송아지 한 마리를 상품으로 내걸었고, 청년씨름판에는 마포를 상품으로 내걸었다.

단오난장은 단오절 5일 동안 날마다 사람들이 붐볐고,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노는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단오 때 벌어서 1년 먹고 살았다라고 할 정도로 단오난장이 순창 장시를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순창시장은 근대까지만 해도 전북 동남부 내륙(남원임실정읍담양옥과곡성)에서 장시권이 가장 컸는데 단오난장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씨름판과 투전판

 

단오난장의 가장 큰 구경거리는 씨름판이었다. 씨름판은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부는 아기씨름이라 하여 어린아이들이 씨름하는 방식이다. 2부는 청년들이 참가해 힘자랑하는 방식인데, 지역별 면 대항식으로 씨름판을 벌였다. 아기씨름과 청년씨름은 상품으로 포목을 주었다. 단오난장 마지막 날에 3부 상씨름판이 벌어진다. 상씨름판은 힘깨나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해 승부를 겨룰 수 있다. 모래판에 먼저 선 사람에게 힘센 장사가 달려드는 방식으로, 최후까지 모래판을 지켜 서 있는 자가 우승한다. 상씨름 우승자에게는 송아지 한 마리를 상품으로 주었다.

단오난장에서는 씨름판이 가장 컸고, 그 다음이 투전판이었다. 투전판은 화투판도 벌어지고, 마작놀이, 주사위로 숫자를 맞춰 돈 걸기, 둥근 판이 돌아갈 때 송곳으로 찍어 돈내기 등 다양했다. 투전판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이곳저곳에서 판을 벌였다. 난장이 설 때에는 머슴들은 집주인에게 용돈을 받았다. 모심기하느라 고생했다며 단오난장 즐기라고 동전 몇 닢씩 주었다. 그 용돈을 받아서 투전판에 기어들어 돈 따먹기를 즐겼다.

 

두룡정 물맞이

 

두룡정 물맞이는 단오 무렵 여인들이 부스럼이나 피부병에 효능이 있기로 유명했던 두룡정(頭龍井)에서 목욕하던 세시풍속이다. 주변이 용머리처럼 생긴 산세라 하여 명명된 두룡정은 두영정두룽정이두렁쟁이두롱쟁이 등으로도 불린다.

순창 여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원임실곡성구례 등지에서까지 많은 여인들이 찾아왔고, 두룡정이 물로 머리를 감아 두통이 없어지고 피부병이 치유된 사람도 많았다 한다.

동아일보 192747두령약천(斗零藥泉)’ 기사에 순창 물맞이 풍속이 실려 있다. “순창군 인계면 두령정이라는 곳에는 백병(百病)이 낫는다는 약수가 수백 년 전부터 용출(湧出)되어 평소에도 부인(婦人) 내왕(來往)이 간단(間斷)이 없으려니와 유독 음력 오월 단오일이면 약수를 마시기 위해 각처로부터 위집(蝟集)한 남녀노소가 수천인에 달하며, 구경삼아 운집하는 인원이 매년 증가됨으로……라는 기사다.

바깥출입이 쉽지 않았던 부녀자들에게 양기 충천한 단옷날 물맞이 외출은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였다. 두룡정에 도착해 목욕도 하고, 샘물을 받아 밥을 지어 먹거나 국수나 미역국을 끓여 먹기도 하며, 한쪽에서는 풍장을 치고 놀기도 했다. 술과 음식을 파는 장사꾼들도 몰려들어 좌판을 벌였고, 간혹 술에 취한 남녀가 두룡정 주변 보리밭에서 일탈적 행위를 벌이는 등 풍속이 문란한 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두룡정 물맞이 풍속에는 다섯 가지 맞이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비 맞고, 물 맞고, 서방 맞고, 매 맞고, 소박맞고이다. ‘비 맞고는 단옷날에 물맞이를 즐기다가 종종 내리는 비를 맞는 것이고, ‘물 맞고는 두룡 약천으로 물맞이를 즐기는 것이며, ‘서방 맞고는 물맞이를 즐기면서 성관계를 맺는 남자를 비유한 말이고, ‘매 맞고는 남편이 부인의 외도 사실을 알고 두들겨 때렸다는 것이며, ‘소박맞고는 결국 집에서 쫓겨났다는 말이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목욕을 못 할 때는 흘러나오는 물을 수건에 적셔 상처 부위에만 대도 효험을 보기도 했단다. 지금은 개천 건너편으로 대규모 인계농공단지가 들어섰으며, 수량이 현저하게 감소했다. 몇 년 전부터 군에서 두룡정 복구 사업에 예산을 투입해 화강암을 우물 정()자 형태로 만들어 샘을 보존하고 표지판도 세웠다.

1960년대 두룡정 물맞이 모습
1960년대 두룡정 물맞이 모습
두룡정 현재 모습
두룡정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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