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주년 3.1절이 다가왔다. 친일청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인계 심초마을 최기수(79) 씨가 할아버지 춘포(春浦) 최광옥(崔光玉) 씨의 독립운동 순국 관련 내용을 밝히며 최근 독립유공자 등록을 신청했다.
지난 9일 오후 자택에서 만난 최기수 씨는 “할아버지(최광옥)가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가산을 탕진해 집안이 매우 어려워졌다”며 “저는 어릴 때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1년에 보리쌀 한말을 주고 서당을 다녔었다“고 회상했다.
최기수 씨 자택 앞에는 ‘전주최씨 합동제단’ 묘지석이 놓여 있고, 그 곳에 봉분 8기가 자리하고 있다.
최기수씨는 “제 아버님(최광옥의 둘째아들 최형식)이 ‘좋은 세상이 돌아올 때 묘지 상석에 아버님 이름을 새기겠다’고 말씀하시며 할아버지 묘소 상석에 묘소 주인과 상주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최광옥 징역 1년, 명치 43년(1910) 3월25일
다음은 ‘국가기록원 판결문 사본’에 기록된 최광옥 씨 관련 내용이다.
성명 : 최광옥
위 폭동 피고사건에 대하여 당 지부는 통감부 검사 지수고차랑(志水高次郞)이 입회변론을 거쳐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 최광옥(崔光玉)을 징역 1년에 처한다.
사실 및 이유
피고는 양윤숙(楊允淑)이 발의하여 많은 사람을 모아 폭동을 일으킨 것을 알고 융희3년(1909) 정월 3일 그의 부하로 들어가 그날부터 수일간 동인과 여러 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전라북도 순창군 내를 횡행할 때 짐을 운반하여 그의 폭동행위를 방조한 자이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가 당 공정에서 한 공술, 검사 및 사법경찰관의 피고에 대한 각 신문조서에 비추어 그 증빙이 충분하다. 법률에 비추어 보니 피고의 소위는 형법대전 제677조 전단에 해당하는 종범(從犯)으로 동법 제135조에 의하여 수범(首犯)의 율(聿)에서 한 등급을 감하여 징역 7년에 처할 것인데, 범죄의 정상에 용서할 만한 점이 있으므로 동법 제125조에 의하여 여섯 등급을 감하여 처단하기로 한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명치 43년(1910) 3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구국 항일운동 의사(義士) 춘포 최광옥
암울한 일제강점기, 구국을 위해 의병으로 나선 최광옥은 1871년 1월 25일 고종 신미(高宗 辛未) 인계면 심초에서 아버지 최성익(崔成翼)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광옥의 집안은 450여 년간 순창군 인계면 심초마을에서 세거하여 대대로 문필이 끊이지 않는 명문 전주최씨 집안이었다.
최광옥은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년 감옥생활 후 7년 후인 기묘(己卯) 정월 15일 순국했다. 최광옥의 묘는 인계면 심초마을 촌전개정지해좌(村前改鼎地亥坐)에 모셔져 있다.
전주최씨 족보에 실린 최광옥의 이름은 병용(秉容)이며, 자는 호일(虎一), 호는 춘포(春浦)이다. 돈헌유고(遯軒遺稿), 재판기록, 양윤숙 의병장 기록 등에는 최광옥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적등본과 1904년 1월 1일 참봉교지에는 양규(良奎)로 되어 있다. 최광옥은 족보에 의병자금조달책으로 적혀 있다. 여러 이름이 혼재되어 있는 이유는 독립운동으로 가명을 쓰며 피해 다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최광옥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유생으로 경학을 공부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전에는 심초마을 전답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넉넉한 집안에서 웃어른을 공경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해마다 명절이 돌아오면 마을주민 수에 따라 하루세끼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귀미(貴米)를 나누어 주며 “한 마을에 살면서 잘 사는 사람은 술, 밥, 고기에 호위호식을 하며 즐겁게 놀고 지내고, 가난한 사람은 명절날 먹을 게 없어서 하루 종일 이불속에서 울고 지내야 하느냐”며 구휼미를 나눠줬다고 한다.
최광옥은 참봉으로 지내다가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국일념으로 참봉직을 그만두고 의병에 투신했다.
그의 의병활동 기록을 살펴보면 1906년 4월 15일 정읍 태인면에서 의병대를 이끌고 출발한 최익현이 담양 구암면에서 1박을 하고 16일 순창으로 향할 때 800여명의 의병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의병활동은 이때부터 최광옥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1910년 3월 25일까지 4년의 시간이다.
최익현과 그의 제자들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자 최광옥은 춘계 양춘영(인영·윤숙) 의병대에 들어가 활동을 계속했다. 전답을 팔아 의병대에 물자를 전달하고 의병자금을 기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최익현이 대마도로 압송된 후 의병가담자를 집집마다 색출하기에 이르렀다. 최광옥은 일본순사들을 피해 다녀야 하는 신세였다. 최광옥을 찾기 위해 일본경찰들은 그의 4형제 중 둘째 동생을 수차례 잡아가 형님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모진 고문을 했다. 둘째 동생은 젊은 나이에 골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상석에 독립유공자 명칭 새길 수 있게“
이후 최광옥의 남은 형제들은 고향 순창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최광옥의 부인 이천서씨는 화병이 나고 나중에는 정신 이상으로 해방 3일 전에 세상을 떠났다. 최광옥의 첫째아들 아들 지식(자 지열)도 모진 고문으로 운명하고, 최기수 씨의 부친인 둘째아들 형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근처에서 연탄장사를 하며 연명했다.
최광옥의 모든 것을 기록한 문집과 대대로 내려온 서적, 가보 등을 6.25전쟁 당시 집 뒤꼍에 굴을 만들어 보관해 두었는데, 빨치산 소탕을 한다고 굴에 불을 질러 대부분 재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최광옥이 받은 참봉교지만은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최기수 씨는 “이제 좋은 세상이 돌아왔으니 국가가 상석에 독립유공자 명칭을 새길 수 있게 해주기를 기대해 본다”며 “올해 77주년을 맞이하는 8.15 광복절에 할아버지께서 꼭 독립유공자로 선정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