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4일 군민의 날, 적성 강경마을 김명자 씨(64)는 군민의 장 효열장에 선정됐다. 김명자씨 본인에게 직접 들은 살아온 이야기를 전한다.
“정읍이 고향인데 전주에서 일하던 남편을 어른들에게 소개받아서 1975년에 결혼했지. 1남 4녀인데 막내 돌 지나고 남편을 잃어서 37년은 된 거 같아. 정확한 년도는 나도 남의 세월을 사니까 몰라.
상할머니, 시어머니 모시며 1남4녀 홀로 키워
옛날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요? 근데 힘든지 모르고 살았어. 그냥 애들 건사하고 사는 낙으로 살았지. 집안 어르신들하고 다 함께 이 집에서 살아서 외로운지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았네. 남들은 시집살이한다고 하는 데 나는 시집살이 없이 살았어.
돈이나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진짜 애들이 많아 갖고 어디 갈래야 갈 수도 없었어… 애들 키우느라 있는 거 파먹고 여태 이러고 살다 보니 나이가 이렇게 들어버린 게 이제 오도 가도 못하고 사는 거지. 애들 가르치려 정신이 없으니까 뭐 남들은 힘드네… 어쩌고저쩌고 별 소리를 다 하더라고, 나는 진짜 하나도 그런 힘든 생각 없었어.
자식들 건사하는 낙으로 보낸 세월
애들 졸업사진 걸어놓는 게 취미였잖아. 얼굴 찍어놓고 또 사각모 씌워서 해놓고, 그러니까 있는 살림에 하면 재미없지만 없는 살림에 그렇게 해놓으니까 하나씩 하나씩, 큰애가 동생들을 또 세워서(큰애가 동생들 공부시킴) 공부를 시키더라고. 큰딸이 고생이 많았지.
동생들 가르치려고 본인이 희생해서 여상을 갔는 데, 졸업하고 백화점에 취업했다가 2년 다니고 “엄마 나 공부할래”하면서 내려오더라구. 근데 여상나온 애가 대학가니까 남원여상에서 처음이라고 칭찬하며 장학금을 주더라구. 어쨌든 대학은 다 졸업시켰지.
도시 가서 내가 돈도 안 벌어봤겠어? 벌어봤는데 그때는 인건비가 싸잖아. 식당일을 하니까 30~40만 원 나오더라고. 근데 그거 진짜 도시 돈 30~40만 원 어디 쓸 데 없구먼. 그러니까 겨울은 나가서 좀 벌어갖고 와서 여름은 또 농사지을 때 또 이러고 그런 식으로 그렇게 하고 살았지.
여기(강경마을)가 한가하고 좋아 왜냐하면 도시 가보면 그잖아요. 내가 뭐 많이 배운 것도 없고 평생 살아온 집인디~ 그냥 이대로 좋아. 그게 철이면 봄대로 여름 여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그대로 여기가 좋아. 왜 못 떠나겠더라고… 애들은 농사도 짓지 마라 하지 마라 저래 쌓는디~ 평생 한 일이고.”
김명자 씨는 시집와서 30대일 때 남편을 잃고 현재 사는 집에서 상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녀 5명을 홀로 키우며 살아왔다. 현재는 경로당 반찬도우미 봉사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근면 성실한 삶이 귀감이 돼 효열장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