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35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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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35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4.2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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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제 35

 

아니 갚아도 되오. 나라의 광복을 찾는데 쓰인다면 내 어찌 이 돈이 아깝겠소. 다만, 일본 순사들이 눈치를 채게 해서는 안 되니 지발 조심히 댕기세요.”

치승이 그들이 준 종이를 펼쳤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장이 선명한 영수증 밑에 광복지후상환삼배(光復之後償還參倍)’ 광복 후 세 배로 갚을 것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백범 선생의 감사서한도 같이 있었다. 치승은 뒷간 뒤쪽 담벼락 밑 구덩이에 묻어둔 항아리를 다시 열어 할아버지로부터 이전에 받은 영수증 위에 올려놓은 후 뚜껑을 닫고 흙을 덮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터졌다.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이 일어난 그 해 늦가을, 여느 때처럼 저녁 술시(戌時)에 독립군 셋이 찾아와 군자금을 건네었는데, 이튿날 새벽 인시(寅時) 무렵, 배씨와 옥씨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정 주사님. 큰 일 났습니다. 한씨가 잡혔습니다. 셋이 주생에 이어 여기로 왔다가 나간 후 강 나루터 주막집에서 유숙하였죠. 한씨가 새벽에 소피를 보러 나갔다가 일본순사의 불시검문에 잡혔습니다. 한씨의 비명소리를 듣고 지들이 뒷문으로 튀었습니다. 그 자가 입이 무겁긴 하지만 그놈들이 매타작을 해대면 장사가 따로 없지라우, 아아.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어어, 이거 큰일이네. 한씨가 뭐 영수증 같은 것 갖고 있었나요? 돈은요?”

? 다행히 그것은 내가 갖고 있었고, 돈은 셋이 나눠 가지고 있었죠.”

! 그러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치승이 귓속말로 말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생면으로 달려갔다. 방기환에게 노끈을 준비하여 치준 형님과 장조카 호연을 동네방앗간에 데리고 가 기둥에 묶게 하고, 치승은 부지런히 면 지서로 향했다. 먼동이 터오는데도 지서에는 불이 켜 있고 한씨가 묶인 채 매타작을 당한 듯 온몸이 피멍이 들어 있었다. 치승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소리를 질렀다.

순사 나리. 큰일 났습니다. 도둑이 들어 집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요. 이놈들이 우리 형님과 장조카를 어디로 끌고 나갔다는디, 걱정이 태산입니다요. 우리 형님 좀 찾아 주시오. ? 아니? 이놈이 그 도둑놈인가?”

순간 한씨가 힐끗 치승을 바라보고 곧 바로 순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식구들이 사흘 굶어 돈 좀 훔치러 간 것뿐인디. 이리 사람을 패 불고, 아이고! 독립군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사람 잡네에. 아이고!”

이때 일본 앞잡이가 한씨의 다리를 걷어차며 치승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아니 정 주사님. 자세히 말씀 해 보시오. 이놈들인가 보네. 이놈이 예사 도둑놈이 아닌 것 같은디

치승이 바로 한씨 머리를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야 이놈아! 돈을 가져갔으면 고이 갈 일이지. 왜 사람까지. 빨리 실토해라. 서낭당에도 없고. 제각에도 없든디. 방앗간?”

아이고. 지가 죽을죄를 지었네요 이. 방앗간에다.”

순사들과 치승이 바로 동네 방앗간에서 둘을 찾아내었다. 치준과 조카가 기둥에 묶여 재갈이 물린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치준이 산발이 된 머리를 올리며 겨우 소리를 내었다.

도둑놈들이 벽장을 뒤져 다 털어 놓고도, 나쁜 놈덜이 더 내 놓으라 함서 우리를 끌고 나갔어. 아이고, 팔이야! 물 좀 줘어! 우릴 죽이지 안 해서 다행이여.”

순사들이 온 집안을 뒤지고 다시 치승의 집을 뒤졌다. 순사들은 측간까지 뒤졌지만 담벼락 밑의 흙더미는 보지 못했다. 일본 앞잡이가 뭔가 미심쩍고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하아, 허는 행동거지가 틀림없는 독립군인디 말이여. 영수증 같은 거 그게. 으음, 아무리 찾아도 없네.”

독립군? 간도 크제. 여기꺼정 왔단 말이요?”

김구인가 상해에 있다는 그놈이. 하여튼 정 주사님도 조심하세요. 혹시 그런 놈 나타나믄 바로 신고해야 해요. 숨겼다간 집안 다 망합니다요.”

 

이틀 후치승이 밤중에 손진관의 장남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돈을 건네며 한씨를 빼오게 부탁하였다. 다행히, 한씨가 배가 고파 그저 돈 많은 부잣집을 턴 것이라 계속 우기며 군자금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으며 버티는데다 순사들도 증거도 없이 계속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데, 마침 읍내 유지가 와 자기의 불쌍한 먼 친척이라면서 뇌물을 주며 부탁하므로, 순사와 앞잡이가 치준 형제를 찾아와 어찌하면 좋겠느냐 물었다.

당연히 감옥소에 보내야제. 근디, 좀 불쌍허긴 헙디다. 그만큼 맞았씅게. 죄 값은 다 치른 거 아닌가? 흐흠.”

도둑 한씨가 훔친 돈을 받은 치준이 그 절반을 떼어 순사와 앞잡이에게 수고비로 건네었다.

 

치준 형제는 인득 할아버지가 평소에 유언한대로 처신을 하였다. 치준은 지주로서 소작료를 적게 받으며 동네 인심을 얻어 나갔고, 치승은 일본 치하의 관리였지만 동포들을 가엾이 여겨 눈에 보이지 않게 도와주고 챙겨주었다.

2년 후 치승의 할머니(숙영)도 작고하여 인득 할아버지 무덤 옆에 묻혔다.

 

치승은 일본이 오래전부터 중국을 삼키려 먼저 친일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일본이 매우 무모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앞으로도 몇 십 년 아니 백년이상 일본이 조선을 계속 통치할 거라고 여겨 친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치승은 일본이 이처럼 두 큰 나라와 계속 전쟁을 벌여 나가게 된다면,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 몇 년? 잘해 봤자 3? 5? 치승은 속으로 기쁘면서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형님, 일본이 이리 날뛰는 것을 보니 이놈들 패망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요. 이놈들이 멀쩡한 어린 처녀를 위안부라며 전쟁터로 끌고 가고 막무가내로 백성들의 밥솥까지 공출해 가는 거 보니 망헐 날이 눈에 보인다니께요. 앞으로 이놈들이 어떤 난리를 쳐댈지 모르니 더 조심시럽게 처신해야 쓰겄구만요. 예전 할아버지 말씀대로 동네 사람들헌티 인심을 더 많이 얻어 두어야겠어요. 올해 가을에 받을 소작료를 낮춰 줍시다요. 우리가 창고에 양식을 더 둬봤자 공출로 다 빼앗기고 말겁니다. 지금은 재산을 늘리는 때가 아니고 베풀 때입니다. 그렇죠? 성님.”

이튿날. 치준 형제는 마름 박씨를 불러 구수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사흘 후 소작농들을 불러 모아 놓고 치준이 말을 꺼내었다.

모두들 힘든 세상이오. 올해는 지금 소작료 2할을 1할로 낮추겠소.”

 

치승이 예상한대로 몇 년 후 1945815일 일본 왕은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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