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 끈 33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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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 끈 33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4.0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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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33

 

호사다마라 했던가. 인득의 집안에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다. 아들 부현이 병이 들어 아직 열여섯 살 나이의 어린 장손 치준과 네 살 터울인 치승을 두고 3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인득은 어린 손자들이 장성하여 자립하도록 어떻게든 미리미리 준비하고 마무리를 잘 하려면, 며느리를 잘 다독이고 챙겨 주며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술과 담배를 끊어나갔다. 치준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내와 며느리 장씨를 모아 놓고 두 손자를 불렀다.

손자들 들어라. 아흔아홉 석 가진 자가 백석 채우겠다고 없는 사람의 한 석을 탐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라. 네 외증조부(김상길)가 말씀하신 것이다. 이 동네에서는 더 이상 재산을 늘리려 허지 말그라. 가난한 마을 사람덜에게 늘 나눠주고 베풀며 서로 잘 어울려야 해. 아직 우리는 타지 사람인 것을 명심하거라.

소작료는 지금처럼 수확한 것의 4분의 1을 넘기지 말그라. 소작인들을 함부로 바꾸지 마라. 그 사람들 목심 줄이여. 소작인들도 먹고 살게 해줘야 논을 기름지게 해 준단다. 과객을 잘 대접허고 이, 거지들을 함부로 내치지 말고 먹을 것을 챙겨주어야 허니라. 세간의 평판이 좋아야 너희와 후손들이 덕을 보고 제사도 끊이지 않게 된다 이 말이여.

치준이는 올 가실에는 장가를 가야제. 거 읍내 장수 황씨 집 알제? 그 둘째 손녀 그 애를 배필로 삼으면 어떠것냐? 괜찮제?”

이어서 치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치승아. 니 어리지만 머리가 영특하고 공부에 취미가 많은 것을 내가 아느니라. 참 다행한 일이여. 일본 유학을 다녀와 관리가 되어 억울하고 가난한 동포들을 돌보고 챙겨주도록 해라.

일본 가기 전에 먼저 혼인을 허자구나. 며늘아, 니 친정 동네 그 양씨 댁이 재산은 없어도 가풍이 괜찮은 집안이라고 들었다. 어떤 규수가 있는지 배필감을 알아보렴.

둘은 잘 들어라. 앞으로 세상이 어찌 변할지 모르겠구나. 지금처럼 소작료나 받고 사는 것이 최고가 아닌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시국과 정세를 잘 보고 거기에 맞게 잘 판단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느니라.“

 

한편, 관평의 치선이 병이 악화되어 결국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아내 윤씨와 열 살과 일곱 살인 두 아들(장연, 길연)을 남겨두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인득은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지만 앞에 나설 수도 없어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 더 나서면 두 집안의 일이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기환을 통해 몰래 얼마간의 장례비를 윤씨에게 따로 부조하였다. 인득은 치선의 동생 치용이 잘 살고 있으니 조카들을 잘 챙겨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인득이 손자들 일을 챙기다가 문득 순창의 일이 또 궁금해졌다.

기환아. 니가 적성에 다녀 온지 꽤 오래 됐제? 그간 그 두 애들이 지 숙부들 밑에서 잘 지내고 있겄지만 말이여. 좀 궁금하구만. 니 퍼뜩 관평에 한 번 다녀오너라.”

방기환이 알아 온 내용을 들은 인득이 실망하고 근심이 깊어졌다.

지가 치선 그 동네 사람들헌티서 들은 얘기인디요. 치선이 작고한 후 약값으로 진 빚을 다 갚고 나니 윤씨 모자에게 뭐 남은 거의 없게 되얏대요 그 후 윤씨가 먹고 살라고 밖으로 내댕기며 행상을 허다가 어느 날 열세 살 장연과 열 살 길연을 남겨두고 어디론지 멀리 떠나 부러,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두 아이는, 별 수 없이 치용 치곤 두 숙부 밑에서 지내게 되었지라우.”

숙부들이 잘 사니 잘 챙겨 줬겠지?”

실은그게 아녀라우. 야들이 부모가 업씅게 서럽게 지내고 있더랑게요. 두 숙부가 조카들을 붙들고 니 아버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다 말아먹고 갔다.’고 말하며 구박허고 이, 남의 눈도 이쓴께 데리고는 있었지만 안에서는 머슴처럼 일을 시키고 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고 있드랑게요. 친자식은 잘 먹이고 잘 입히면서도 아무래도 조카다 보니 남의 자식 취급한 것 같습디다.

지금 장연이 열네 살이 다 되어 가는디 소학교도 안 보내고 이, 인정머리가 좀 없어 가꼬 말 안 듣는다하며 또 일도 못한다며 밥도 주지 않을 때도 있었등가 봐요. 다행히 같은 동네에 시집 간 인정 많은 고모가 좀 챙겨주긴 했지만요. 하여튼 이 두 형제가 가련하고 불쌍한 처지가 되어 있습니다요.”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이거 참, 큰일이구나. 우리 집에 은혜를 준 큰집 장손이 이렇게 불쌍하게 되다니. 참으로 난감하게 되얏구나 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니 생각은 어떠냐?”

제가, 뭐 알겠습니까마는 은혜를 받으셨다 허니께 그 댁 장손의 불행을 모른 척 하기가 좀 그러것습니다요.”

인득은 사흘 밤낮을 고심하다가 기환을 다시 불러 밀봉된 편지 한 통을 주며 치용을 만나라고 하였다.

어떡허든 큰 애 장연이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와라. 만약 치용이 그 사람이 끝까지 안 된다고 허면 마지막에 이 편지를 주그라. 다른 사람이 봐서는 안 돼야.”

 

방기환이 아침 일찍 관평으로 가 치용에게 장연이를 데려다 키우겠다고 말하였다.

당신이 누군디 우리 장조카를 데려다 키운다는 거요?”

그게, 아까도 말했지만 지가 아니고 주인의 부탁이라고 했잖여요? 여기서 키워 봤자 친자식도 아닌디, 차라리 그분한테 맽겨 핵교에 다니게 하는 것이 이 애한테는 더 좋지 않겠소이까? 장개 갈 나이가 되믄 보내드린다 하니 걱정 마시쇼.”

그쪽 어르신? 생판 모르는 당신네도 그렇고, 그 당신 주인이라는 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내 잘 모르고 있는디, 내 어찌 그러라고 허것소 이?”

방기환은 할 수 없이 인득이 준 밀봉편지를 건넸다. 치용이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감격한 모습을 보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편지를 다시 한 번 보고 바로 화롯불에 올려 태웠다.

아아! 이리 챙겨 주시겠다 허니 지야 감사할 따름이네요. 이 은혜 백골난망이외다. 우선 같이 점심을 드십시다.”

치용이 치곤 부부와 선옥을 불러 모았다.

장연아. 많이 묵거라. 오늘 당장 방씨 아재를 따라 가그라. 이분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잘 따르며 지내야 혀.”

 

이때 기준이 얘기를 중단시켰다.

어르신, 인득 할아버지가 그때 건넨 편지의 내용은 뭐였나요?”

그거? 아마도 두 집안의 과거 내력을 털어 놓고 잘 키워 일본유학도 보내고 장가 갈 나이가 되면 돌려보내겠다. , 이런 내용이었겠지. 또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야헌다고 부탁하고 다짐했을 거이고.”

그렇겠네요. 두 집안 간의 일을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었겠지요.”

 

치승의 얘기는 다시 계속되었다.

 

방씨는 주인 인득의 명을 받들어 장연을 데리고 곧장 전주로 올라가 미리 구한 하숙집에 짐을 풀게 하였다. 선생을 따로 두어 초등학교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중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일본어 선생이 방씨에게 공부머리가 좋아서 배우는 속도가 빠르네요. 이제 일본에 가서 공부하기에 충분하다.’고 칭찬하였다.

인득은 둘째 손자 치승에게 임무를 주어 장연을 데리고 부산에서 현해탄을 건너게 했다. 장연에게는 방씨의 외가 쪽 친척이라 말하고 이름도 김치승이라 하였다. 치승은 장연이를 동경의 자기 모교에 입학시키고, 장연이 정착이 된 것을 본 후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인득은 방씨를 시켜 매 계절마다 하숙비와 학비를 보내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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