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31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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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31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3.2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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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31회

설이 지나고 입춘이 될 무렵, 인득이 서당 책 걸이핑계를 대고 훈장과 손씨, 그리고 동네 양반 유지들을 오게 하여 잔치를 벌인 자리에서 훈장에게 보첩을 보여 주었다. 몇 장을 넘기며 보던 훈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러분들 들어 보시오. 주인장의 족보를 보아하니 충청관찰사를 지내신 분의 자손이네요. 우리 옛 조상 권율 장군님도 선조대왕 때 전라관찰사를 지내셨는디 시기는 좀 다르긴 혀도 같은 관찰사를 지내셨으니 인연이라 봐야지 않겠어요? 허허. 평소 책을 읽으며 시조도 짓는다고 들었소이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씨가 박수를 치자 모두들 술잔을 들었다. 해가 진 후 인득이 책 걸이 감사 선물이라 하며 청나라 비단 두 필과 나락 두 섬을 챙겨 각각 훈장 집과 손씨 집에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득은 훈장의 미심쩍어하던 표정이 여전히 어른거려 걸쩍지근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이듬해 제비가 날아온다는 음력 삼월 초, 인득이 또 다시 명진을 찾았다.

어르신. 인자는 동네 어느 누구도 저를 상놈이라고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요. 이 은혜 어찌 갚아야 헐지 모르겠네요.”

에이, 둘이만 있을 때 인자부터는 대부님이라고 해도 돼야.”

! , 대부님. 이제야 사람대접을 받으니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지가 대부님께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릴 겸 왔습니다요.”

그려어? 고기와 떡을 가져왔으면 어서 내 놓게. 허허.”

물론입죠. 마루에 다 대령해 놓았습니다요. 하하! 굴비도 두 두름 가져 왔지라우. , 인권(기준의 고조)형님은 집에 있습니까요? 인사라도 드리고 가야겠는디요.”

건넌방에 있을 것이네. 이제는 일가가 되었으니 형 동생하며 지내야 되네.”

인권이 소과에 급제하였지만 그냥 생원으로 지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외척세도가에 밀려 미관말직도 받기 힘들고, 게다가 당시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시절이어서 아예 대과에 응하지 않았다. 세도가들과 다리를 놓아 주겠다는 자들이 있었지만, 인권은 그리해서 벼슬을 가진다는 게 스스로 탐탁하지 않아 그냥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인득은 예우를 갖추어 인권을 형님으로 모시고 인사를 드렸다. 이어서 그의 아들 도현(28세손, 기준의 증조)의 인사를 받았다. 도현의 나이가 인득의 아들 부현이 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관평에서 일을 마친 며칠 후 인득이 부모(상진)가 사는 곳으로 갔다. 부모는 연로하였지만 다행히 큰 병은 없었다. 두 조카의 절을 받고 인근의 아내가 차려준 상을 받아 온 식구가 둘러앉았다. 몇 십 년만의 가족 모임인가! 인득은 목이 메었다. 인득은 그간 정명진의 배려로 강변 땅을 개간하여 재산을 늘린 일, 보첩을 만들어 낸 일, 사랭이의 일상과 고모 은로와 초연을 만난 일까지 다 말하였다. 상진이 감격하여 아들 손을 꼭 잡고 목이 메어 울먹였다.

아부지, 어무니. 우린 인자종이 아녀라우! 양반, 양반이 되얐당게요. 올 추석 전 아부지 생신 때 우리 모두 한 자리에 모입시다요. 우리 가족뿐 아니라 고모 가족들도 오게 할 겁니다요. 그때 지가 생신잔치마당을 벌여 초연이한테 춘향가를 부르게 할 겁니다. 풍악꾼들을 부르고 하여튼 거판지게 할 거니까 온 동네 사람들 다 모이게 허세요. 몸 간수 잘 하시고요.”

이튿날 아침 인득은 인근 부부에게 두툼한 돈주머니를 건네며 생신잔치를 준비하라 고 일렀다. 인득은 3년 전 젊은 나이에 아이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어 애까심이 된 여동생을 생각하며 사랭이로 돌아왔다.

 

며칠 후 손씨가 따로 찾아 와 형제자매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누이를 그냥 그렇게 살게 할 겁니까? 훈장 댁 장남이 아들도 없이 상처(喪妻)한 것을 아시죠? 내가 한 번 나서 볼까요?”

마침내 두 집안이 사돈이 되고 얼마 후 훈장은 손자 둘을 두게 되었다. 권 훈장은 이전에 보첩을 들여다보며 좀 미심쩍어했던 기억을 잊었다.

인득은 읍내 유지 장씨의 둘째 여식을 부현의 아내로 맞아 들였다. 딸도 손진관 장조카의 셋째에게 시집을 보냈다.

 

인득은 마을 뒷산을 사 우선 해남에 있던 장인 김상길의 묘도 옮겨왔다. 그리고 한양 남쪽 청계산의 청계사 동쪽 국사봉 계곡에 있다는 김상길 부모의 묘를 어렵게 찾아내어 장인의 묘 위쪽에 모셨다. 장모 윤씨와 아내 숙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모가 세상을 뜨고 3년이 지난 후, 인득이 순창 적성에 있는 조상들의 묘를 찾기 시작했다. 노환으로 누워 있던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려 봤지만 할아버지의 윗대 조상들의 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노비가 죽으면 묻을 곳이 없어 그저 거적에 싸 주인집의 은덕을 입고 싶은 심정으로 선산 한쪽 골짜기에 몰래 묻느라 제대로 된 봉분을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인득은 지관의 말에 따라 할아버지 묘 부근에 있던 곳에서 가까운 위쪽 약간 둥글게 올라온 곳(봉분)들의 흙을 파 항아리에 담아 와 윗대 조상들의 묘 봉분을 쌓고 그 밑에 할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정조대왕이후, 순조·헌종·철종 360여년 세도정치 하에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삼정문란과 재난과 질병이 만연하면서 곳곳에서 농민 봉기(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고종 때에 마침내 동학농민운동이 열화같이 일어났으나 녹두장군 전봉준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노래에 불쌍한 농민들의 한()을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본의 국권침탈야욕 속에 조선은 점차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그 즈음, 적성에서 정명진이 타계하였다는 부고가 왔다. 상주 인권과 손자 도현이 인근 유지들과 명진의 가르침을 받고 평민이 된 노비출신들의 문상을 받고 있었고, 방안에는 두 살 난 증손자(치선)가 칭얼대고 있었다. 상여꾼들이 어느 덧 강변의 논 중간으로 상여를 매고 가 세 번 내렸다 올렸다 하고, 종구잽이(앞소리꾼)가 선창하고 열두 명 상여꾼들이 후렴을 부르는 상여가(喪輿歌) --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 어노 어노 어이 가리 어노오.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알려 주소.- 어노 어노 어이 가리 어노오-- 섬진강의 물소리와 상주들의 곡소리에 섞어 더 구슬프고 처량하게 들렸다.

인득은어느 누구보다도 노비들을 긍휼히 여기고 언문과 산수를 가르치며 책을 읽게 해주고, 인득 집안을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하며 면천에 이어 마냥 허세만 부리는 양반이 아닌 참된 양반이 되게 해준 특히, 친아버지나 다름없이 사람의 도리를 일깨워 주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꼭 보답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수십 기의 만장기가 휘날리는 상여를 뒤따랐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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