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34회-정문섭
상태바
[연재소설]인연의끈 34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4.16 1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손 치준이가 아들 호연과 두 딸을 두었다. 치승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군청의 하급관리가 되었다. 아내 남원 양씨 사이에 딸 영숙과 아들 성연을 두었다.

 

어느 해 섣달그믐께, 인득은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와 며느리를 모이게 하고 손자들을 불렀다.

내 나이 벌써 일흔 다섯이 넘어섰구나. 치준이 니가 재산을 잘 관리하고, 치승이 군청관리가 되어 지내니 기쁘고 감개가 무량허구나. 우리 자손들이 어떻게든 공부를 많이 하게 대학을 보내라. 일본을 이길라믄 많이 배워야 해.

언젠가는 광명의 날이 올 거시다. 암 오고말고. 그때에 일본에 부역(附逆)했다고 손가락질을 받고 집안이 온전치 못할 수도 있어. 늘 동포를 가엽게 여기고 도와 인심을 얻어 두어야 해.“

이어서 인득은 자기 사후 다툼이 없도록 두 손자 명의로 각각 이전한 전답문서와 장손 명의로 해놓은 선산과 종답의 문서를 내 놓았다.

 

이듬해 설이 지난 후, 인득이 여기저기 더 아프기 시작하여 점차 걷는 것이 힘들어지고 숨이 가쁜 증세가 심해지며 누워 있는 날이 많아졌다.

누워 있던 인득이 작은 손자 치승을 따로 불렀다.

치승아. 저 벽장에 책 한 권과 문서들이 있을 거이다. 꺼내와 보거라.”

. ! 이것은 우리 집안 보첩이네요. 문지가 많이 묻었네요. 좀 털고 올게요.”

그래라. 니가 한 번 읽어 보고 내 앞에서 해석을 해 보아라.”

치승이 얼굴에 호기심을 가득 세운 가운데 책장을 넘기며 해석하였다.

니가 본 대로 우리 집안은 초계 정씨 광유후 배걸 시조 이래 자손들이 벼슬도 하면서 지내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흐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놀라지 말고. 니가 배운 자이고 관리가 되어 내 말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되어 있어 너에게만 말하는 것이니라.”

인득은 먼 옛일을 회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옛적 할아버지들이 순창 정명진 주인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보부상을 한 이래 일어난 자초지종을 죽 설명하였다. 치승이 놀라 숨을 죽여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또 한편으로 안도의 숨을 쉬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내가 이 사실을 명진 어르신의 손자 도현이에게 말했을 때, 도현이가 처음 듣는 얘기라며 깜짝 놀라더구나. 도현이도 장남 치선에게만 말했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인자는 너 뿐이여. 니 자손에게도 이 말을 하지 말거라. 조상이 본디 종이었다고 허면 어느 자손인들 기분이 좋겠느냐?

사실 내가 이 말을 하지 말고 세상을 떠도 된다만, 나 혼자만 알고 죽기에는 양심이 걸리더구나. 우리가 잘나서 또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고 명진 대부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로 시상에 낯을 내놓고 이리 살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너에게만 특별히 말해주는 것이니 그리 알거라 이.”

아아! 상상도 못했어요. 그러면, 장연이는 어떻게 챙겨줘야 헐까요?”

기환에게 내 미리 일러두었느니라. 그 애가 일본유학을 마치도록 계속 뒷바라지를 해야 해. 내가 예전에 너에게만 따로 말했던 그 산 아래 스무 닷 마지기 논 알제? 그걸 장연이 학비로 써 오고 있었단다. 그 애가 공부 마치고 돌아오면 나머지를 팔아 한양에서 교편을 잡고 정착하는데 쓰게 하렴. 장연이 그 애가 착실하고 머리가 있으니 잘하고 올 것이다. 니 한양 친구를 통해 그 애 교편자리도 챙겨 줘야 해. 알았제? 장연이 밑에 동생 그 애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 명심헐게요. 근디 이건 무슨 문서들입니까?”

어 그거? 한양 마포 나루터 부근에 있는 땅과 집문서들이다. 옛적 목포 객주시절 보부상들이 일하고 숙식하던 점포와 숙소였어. 여기 네 필지 중 서쪽으로 좀 떨어진 여그에 장연이네가 살게 해 주거라. 나머지 세 필지는 그대로 두었다가 우리 자손들이 낭중에 한양에 가 공부라도 하게 되면 거기로 이사하여 살게 하면 좋을 것 같구나. 길가에 있는 이 넓은 가게는 세를 내주고 있다.”

할아버지. 이 문서는 뭡니까? 영광에 뭐가 또.”

내가 깜박했구나. 그 객줏집, 내 그간 바빠서 챙기지 못한 것인데.”

인득이가 자기 옛 수하의 자식에게 위탁을 주어 운영 중에 있고, 앞으로 자손 중에 장사에 관심이 있거나 소질이 있는 애가 있으면 마포에 특산물 점포를 세우고 영광 그곳과 맞춰 운영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치승아. 나 죽은 후에라도 장연이의 서울 정착을 챙겨주고 또 어떻게 지내는지 이삼년에 한 번씩 기환을 보내그라. 기환이는 두 집안간의 깊은 내막은 아마도 잘 모를 거이다. 알더라도 입이 무거운 자이니께, 걱정할 것은 없을 거시여.

먼 훗날 너에게도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될 날이 혹시 올지 모르겠다만, 그럴 때가 되면 얘기해도 괜찮을 거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양반 상놈 차별이 없는 좋은 세상이 온다면 말이다. 또 우리 집안이 잘 풀려나가게 되면 이런 얘기가 참으로 아름다운 미담이 될 수도 있을 거시여. 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구나. 명심해라.”

인득이 이어 방기환을 불렀다. 치승의 면전에서 장연의 일은 앞으로 치승의 뜻에 따라 행하라.’고 명했다.

 

인득이 몸이 더 안 좋아졌다. 치준과 치승이 그의 양 옆에 앉았다.

잘 들어라. 우리 조선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지 어느 덧 이삼십년이나 지나부렀구나. 3.1만세 후에 많은 독립투사들 그 분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을 너희들도 다 알고 있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의사,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큰일을 허신 분들, 정말 가심이 메이는구나. 우리는 머 헌 것이 없어, 많이 부끄럽더구나.

몇 년 되었다만, 백범이 보냈다는 분들이 우리 집을 찾아 왔단다. 독립은 요원한 것 같지만 그려도 난 광명의 날이 꼭 올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는 않았어. 그려서 그 사람덜헌테 우리 집이 받아 온 소작료의 10분의 1을 드리겠다고 약조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내 죽은 후에라도 말이여. 그 사람들이 오면 나 하던 대로 내 주그라. 그 중에 한 사람은 너그들도 아는 사람이여. 읍내에 사는 유지 장진욱, 바로 너그들 작은 외삼촌이니라. 이것들은 그 분들이 준 영수증과 감사서한이란다. 일본 놈들이 알면 큰일 나니 잘 간수해라.“

 

보름 후, 인득이 숨을 거두었다. 비천하게 태어났지만 주인 정명진의 배려를 받아 목상객주에서 일하며 주인의 신뢰와 인정을 받아 데릴사위가 되어 재산을 크게 늘리고 집안을 일으킨 인득이 세상을 뜬 것이었다. 손진관을 비롯한 수십 명의 읍내 유지들과 온 동네 남녀노소 수백 명이 상여를 따르며 애도하였다. 치준 형제는 할아버지를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선산에 묻었다.

 

인득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겨울 어느 밤중에 네 사람이 치준 형제를 찾아왔다. 그중 낯설지 않은 한 사람, 외삼촌을 보고 그들이 왜 왔는지를 바로 알아 차렸다. 두 형제는 모르는 사람을 본 듯 전혀 아는 체를 하지 않고 바로 미리 준비해둔 돈 봉투를 내 놓았다.

우리가 할아버지한테 들은 바가 있습니다. 여기 준비해두었으니 가져가셔요.”

저는 배가이고 이 동지들은 한씨와 옥씨입니다. 이 은혜를 갚아야 헐지 모르겠소. 지금 일제 치하에서 어느 누구도 독립이 된다거나 광복이 올 거라 믿는 자가 없는디도 이리 흔쾌히 주시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 헐지. 여기 영수증과 친서를 드립니다. 해방이 되면 갚아드릴.”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