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바친 옹기 전수 위해 귀향한 안창기씨“
상태바
평생을 바친 옹기 전수 위해 귀향한 안창기씨“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2.03.08 0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창 가마 명성 찾자”

▲ 적성을 떠나 남원, 이천, 강진, 벌교, 장흥 등 전국 각지를 돌다 50년 만에 군에 정착한 안창기씨의 꿈은 고향에서 후계자를 배출하고 장인칭호를 얻는 것이다. 그는 곧 내월리에 옹기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평생을 옹기 제작에 바친 한 장인이 최근 귀향해 사라져가는 옹기를 살리려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장류와 옹기의 동행이 필요했던 군에서 그의 귀향은 사뭇 반갑기까지 하다.

안창기(67ㆍ적성 내월)씨는 지난해 8월 귀향했다. 고원리 점촌마을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대대로 옹기일을 해온 조부모와 숙부를 이어 옹기제작에 뛰어들었다. 초등학교만 마친 그는 16세 때부터 옹기에만 몰두했다. 도자기도 배운 것은 군대를 다녀온 뒤 25세 때였고 옹기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안씨는 “옹기는 60~70년대에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도자기가 인기가 있었다. 광주 월산동에 사는 김귀정 사장을 찾아가 도자기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옹기장이는 이전에도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무색하게 남녀가 한 곳에 어울려 일을 했고 불을 가까이 하니 웃옷을 벗고 일하는 남자들이 볼썽사납다는 양반논리였다. 옹기가 인정받게 된 것은 참살이(웰빙) 음식과 도구가 뜨기 시작한 2000년이 지나서였다.

 장류와 옹기 만남은 군에서도 추진하던 일
“천연유약 써야만 질 좋은 옹기 만들어져”

안씨의 증조부는 구한말 전라도 감사를 지냈지만 천주교를 믿는 것이 발각돼 몸을 피해야 했다. 적성면 점촌마을로 몸을 피한 그는 이곳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고 옹기일을 배워 자녀에게 전수했다. 안씨는 4대째 가업을 잇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자녀들은 옹기를 배우지 않아 5대째는 나오기 어렵게 됐다. 안씨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옹기를 만드는 기러기아빠가 됐다. 한 곳에 머물러 성장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직업과 작품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적었다.

안창기씨가 귀향한 이유는 귀소본능과 함께 고향에서 후계자 양성이 필요하다는 고민에서였다. 아직 그의 밑에서 흙을 만지는 젊은이는 없지만 옹기공장을 만든 뒤에는 일을 물려줄 사람을 찾고 군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체험학습을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옹기의 장점은 생활 쓰임새가 넓고 몸에도 이롭다는 것이다. 다만 독이 숨 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연유약을 썼을 때의 얘기다. 안씨는 “옹기나 도자기를 만들 때 유약을 쓰지 않으면 물이 새므로 효용성이 떨어진다. 화공약품으로 만든 유약은 빛이 좋고 천연유약보다 낮은 온도(약 1000도)에서 녹기 때문에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 흙과 나무를 태운 재를 이용해 만든 천연유약은 1120도(℃)에서 녹는다”며 “옹기의 질은 흙과 유약,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천연유약이 비용은 더 들지 모르나 음식변질이 없고 강한 불에서 독이 확실히 여물어 내구성이 좋다”고 설명했다.

옹기와 도자기를 함께 다룰 줄 아는 그는 재료와 용도가 서로 다르다고도 말했다. 일단 옹기는 점토를 사용하고 도자기는 돌가루로 만들어지는 점이 다르며 생활도구로 널리 쓰이는 옹기와 달리 도자기는 관상용 성격이 강하다. 안씨는 “점토는 점성이 있어 크게 만들 수 있지만 돌가루에는 점성이 없어 작품 크기가 작다. 색이 예뻐 관상용으로 각광받고 실제로 옹기가 하향세일 때에도 도자기는 사랑받았다”며 “도자기 유약은 1300℃에서 녹아 옹기와 같은 것을 쓸 수 없다. 그 정도 온도면 옹기 흙은 타서 재가 된다”고 말했다.

전통 옹기나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시력이 안 좋은 경우가 많다. 불의 색을 봐가며 온도조절을 해야 하다 보니 강한 열에 노출돼 눈이 상한 것이다.

주문자가 원하는 형태로 옹기제품이 나올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천상 옹기장인이다. 50년이 넘는 세월을 옹기에 매진해 원하는 어떤 형태로든 옹기 제작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대외적으로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귀향해서도 옹기를 살려보겠다고 나선 그는 일단 군에서 천연유약을 발견한 성과를 거뒀다.

“300년 역사를 가졌던 순창의 옹기가 사라진 것은 교통이 불편한 시기에 점토가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남산마을 가마터는 점촌에서 뻗어나간 것으로 시장이 가까워 활황도 겪었다. 장류와 옹기는 뗄 수 없는 사이이므로 옹기공장은 분명 장류산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는 그는 민속마을에 옹기터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얼마 전 군이 발표한 11개 역점사업에는 장류전용 옹기가마터 유치가 들어있었다. 그의 귀향이 전통문화와 옹기 살리기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