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재(33) 이기심과 나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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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재(33) 이기심과 나와 남
  • 박재근 고문
  • 승인 2012.03.29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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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본래 남이었다. 한 가정을 이루면서 우리가 되었으나 본래는 남과 남이 만나서 나를 낳았으니 나란 남과 남에 의한 남의 자식인 셈이다. 남이란 내가 태어나게 된 나의 뿌리이고 근본이며 몸의 고향이다. 생명의 유전자는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 남을 원한다. 해서 피가 남과 나누어지길 거부하면 종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유전 법칙은 천리이고 천리는 독점을 미워하고 나눔을 권장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집안이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남을 거부하고 근친끼리 혼인을 계속한다면 그 집안은 멸망할 것이다. 실지로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자기 부족이외의 혼인을 금지한 결과 체형이 극히 작아지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어져 지구상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상들이 근친혼을 불륜으로 규정하여 금지한 이유는 종족의 보존을 위한 지혜의 산물이다. 오늘날 세계 120여 인종이 함께하고 있는 미국이 강성한 이유는 잡종 강세의 유전 이론을 뒷받침 한다고도 할 수 있다.

피가 남과 함께 해야 종이 건강하게 보존 되듯 생각 또한 남과 소통함으로서 건강해진다. 소통이 없는 생각이란 도리에 합당한지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고립된 생각으로 어둠과 무지에 의한 편협으로 흘러 지혜를 결여하기 쉽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저승 여행을 가서 천국과 지옥을 방문하였는데 천국이나 지옥이나 모든 사람들이 손목이 없고 굽혀지지 않은 팔은 하나뿐이며 음식은 목이 좁은 항아리에 있는데 입이 닿을 수 없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손 없는 굽혀지지 않는 팔을 원망하며 피골이 상접하여 서로를 원망하며 노려보고 아우성인데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팔을 젓가락 삼아 제삼자를 먹여 주며 얼굴에는 한결 같이 웃음이 묻어나고 윤기가 나 있었다. 남을 배려함으로서 자신이 사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즉 우린 남과 함께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존재이다. 해서 나와 남은 우리가 되는 것이며 함께 사는 길을 거부하는 것은 본래 남에게서 온 자신의 뿌리와 존재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인류의 존엄성을 높이고 만물 중 최고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길이다. 이기심은 보다 큰 나 즉 남이 공감하고 남으로부터 사랑받고 존중받는 나를 버리고 작은 나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굽은 생각, 굽은 소신, 하찮은 감정을 애지중지하여 남으로부터 미움과 소외를 자초하고 좁은 틀 속으로 나를 가둔다. 자신의 실체를 마음으로 규정하고 남과 함께 함으로써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보다 큰 나가 아닌 몸에 기초한 나를 강조할수록 나는 작아지고 어두워지며 추해지고 외부와 격리된다. 이기심은 무지에서 비롯된 눈먼 자기사랑으로 자신과 남의 불행을 만드는 불행의 제작소이다.

心者形之君而神命之主也(심자형지군이신명지주야) [순자]

마음은 몸의 군주이고 정신과 생명의 주인이다. 자신의 핵심은 몸이 아닌 마음인데 이기심이란 마음을 몸에 종속시킴으로서 생긴다.

心外無理心外無事(심외무리심외무사)

마음을 떠나선 이치가 없고 마음이 없으면 일이 없다. 인간에게서 함께 사는 아름다운 마음을 제하고 나면 무엇으로서 짐승과 다름을 구별 하겠는가? 물체의 아름다움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인간의 아름다움은 마음에 있으니 나의 주체가 몸이 아닌 마음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속의 아름다운 경치나 꽃을 보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물체의 외모에서 풍기는 호감에서 비롯되며 그 호감은 순수한 아름다움일 수 있다. 하지만 값비싼 보석 등은 인간에게 탐욕의 마음을 심어 분열과 차별을 조장하는 불길하고 사악한 거짓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마음이란 천하와 함께하는 공존의 마음이며 경쟁의 마음이 아니고 도우며 기르는 마음이니 천하 만물이 우군이고 그 수명은 천하의 생명과 함께 함으로써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즐겨 추구한 최상의 가치이다.

大人無己(대인무기)[장자] 큰 사람은 자기가 없고 至人無己(지인무기)[장자] 지극히 훌륭한 사람은 자기가 없다. 그릇이 큰 사람은 세계와 자기를 일체로 보는 사람이며 지극한(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서 금시 썩어 없어질 몸에 연연해하지 않고 세월과 장소를 초월해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영원히 살기위해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있으니 예수는 33세에 몸을 버리고 소크라테스는 담담한 마음으로 독배를 들며 웃으며 몸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글 : 박재근 전북흑염소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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