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읽게 되니 세상이 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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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읽게 되니 세상이 환해요”
  • 정기애 기자
  • 승인 2012.06.0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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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싶은 사람’에게 쓴 편지를 앞에 나가 읽고 있는 할머니

▲ 조옥순 할머니가 딸에게 직접 쓴 편지

‘가을은 오곡이 풍성한 계절이지만 낙엽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 계절이 나인 것 같아서 몹시 쓸쓸해’

선생님이 한 문장씩 먼저 읽으면 그대로 따라서 읽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천상 얌전한 학생들의 얼굴이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공책에 한자 한자 글씨를 꾹꾹 눌러쓰는 할머니의 투박한 손끝에는 글을 배운다는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보고싶은 사람’이란 주제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써온 할머니는 선생님의 호명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앞으로 나가 또박 또박 읽어 내려 간다. ‘아이고, 난 못해’ 하며 수줍은 미소를 짓던 할머니는 편지를 읽다가도 ‘여긴 틀렸네’ 짚으며 어린학생처럼 혀를 쏙 내민다. 평생 한글을 모르고 살았던 할머니들이 한글교실에 나오면서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텔레비전 자막도 읽고, 버스노선도 볼 수 있게 되고, 딸에게, 손자에게 직접 편지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팔덕, 풍산 등지에서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할머니들은 한글을 모른다는게 부끄럽다며 친한 이웃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닌다. 그러나 먼 지역에서도 버스를 타고 꼬박 꼬박 수업에 빠짐없이 나오는 할머니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 읽기, 쓰기를 하게 되면서 고단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인 듯한 움푹 패인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교육지원청 공공도서관(관장 김은주)에서 운영하고 있던 한글 교실이 올해 초 예산문제로 중단됐으나 할머니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지난 4월초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애초 도의회에 평생교육비 항목으로 신청한 추경 예산안이 확정되면 올해 하반기부터 다시 한글교실을 열 계획이었으나 할머니들의 요청으로 일찍 시작하게 된 것이다.

김은주 관장은 “할머니들이 강사한테 찾아가서 한글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등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해 계획보다 빨리 다시 문을 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도서관 한글교실은 수ㆍ금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일주일에 세차례 운영되고 있다.

인터뷰/ 반장 조옥순 할머니

동화책도 빌려 볼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한글교실을 5년째 다니고 있는 조옥순(71) 할머니는 은빛 한글학교 반장님이다. 

한글을 모른다는걸 평생 남편한테 숨기며 가슴 조리고 살았는데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울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

“나는 참말로 용 되았어. 순창 교성리에서 태어나 9살 차이난 신랑한테 시집을 왔제. 우리 신랑은 인물도 훤하고 키도 크고 배움이 깊어 한자도 많이 알고 참말로 유식한 양반이었제.

우리집 양반은 내가 한글은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제. 20년전 돌아가실때까지도 말여.

시집온 지 얼마 안되어 내가 글 다섯 자씩 알려주라 하니 그 양반은 그 다음날부터 한자를 써놓고 한 자 한 자 알려 주는겨. 나는 한자는 안 보고 그 밑에 써진 한글로 된 음과 뜻을 익히고 고개는 끄덕끄덕했어. 차마 글을 모른다는 말은 할 수가 있어야제. 남편은 그 후로도 눈치 채지 못했제. 남편이 건축을 했는데 사업이 한참 잘 되었을 때의 일이여. 하루는 통장을 던져주며 돈 1000만원을 찾아 오라는겨. 나는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제. 궁리 끝에 오른 팔을 붕대로 감고 농협에 가 직원한테 말했제. 내가 팔을 다쳐 글을 못쓰니 대신 써주라고 말여. 그뿐이 아니제 .내가 우리 남편한테 안 들키려고 했던 일을 책으로 써도 몇 권을 될겨. 나는 사복사복 걸어와 이렇게 조금이라도 배우는 것이 얼매나 행복한지 몰라. 도서 대출증도 만들어 위인전과 동화책도 빌려 보고 말여.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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