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을 날려버리는 단비 소식에 애 태웠는데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마감에 다급하나 졸음을 쫓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요즘 신문과 방송, 인터넷까지 ‘몰입도’ 최고라며 앞 다투어 칭찬하는 드라마 <추적자>가 방영 중이었다.
‘호스트바 출신의 잘나가는 아이돌 가수, 그 아이돌 스타의 정부이자 스폰서인 재벌 집 딸, 목표를 위해선 아내의 불륜은 물론 여학생의 죽음조차 이용하는 정치인, 그런 정치인을 사위로 둔 재벌 총수의 권력 남용, 돈과 권력 앞에 머리를 숙이는 대법관 출신의 유명 변호사와 검찰, 진실을 거부하며 여론을 왜곡 호도하는 언론 등 이른바 ‘권력 묶음’과 수십억원 현금에 눈이 멀어 친구의 딸을 죽이는 의사까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형상이다. 이들 앞에선 탄원서를 외면하는 교권과 연예인을 신봉하는 무지한(?) 팬 등이 오히려 애처로울 지경이다. 한국사회의 부패와 비리, 부정과 불의를 집대성한 듯 적나라하게 까발린 탄탄한 스토리와 농익은 연기자들 덕분에 흥미진진하고 한편 심각해지는 드라마 <추적자>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추적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갑자기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자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세상과 맞서 싸우는 소시민(강력계 형사)이 무변광대한 권력과 싸우는 드라마다.
<추적자>에서 권력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 사실이 자신의 야심(대권)에 치명타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이미 저지른 범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세상에 노출시키지 않는 치밀함을 보이며 새로운 희생(자)을 양산한다.
현실을 어떤가? 드라마 속의 전전긍긍하는 모습과는 달리 현실 정치와 사회에서의 권력자는 이미 수많은 범죄사실과 비리혐의가 밝혀졌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노출된 적 없는 자신의 범죄행위와 비리에 전전긍긍하는 드라마 속 권력자와는 달리 이미 밝혀진 자신의 비리와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일말의 반성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현존하는 권력가들. 그래서 현실이 드라마보다 수백만배 더 추악하게 보인다.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보면 깔려죽는 벌레가 있기 마련이지.”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의 소소한 꿈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을 수 있는 그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정의로운 사회ㆍ공정한 사회 구현’을 외쳐댄다. 지난 군사독재시대에서도 ‘문민민주시대’라는 요즘도. 이 드라마에서 우리는 정도는 다르지만 현실에서 쉬 볼 수 있는 일이라는 분노와 슬픔을 떨쳐낼 수 없다. 이 같은 분노와 찝찝함, 불편함은 드라마의 충분한 현실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어느 평론가는 이 드라마의 장점 중 하나로 ‘이야기의 현실성’을 꼽았다.
전화 한 통이면 자신에게 불리한 어떤 진실도 간단히 은폐할 수 있는 거대 권력 앞에 맨주먹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소시민 아버지의 처절한 고군분투가 남의 일 같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억울함과 분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 특히 지도층의 부도덕함을 그려낸 <추적자>는 매우 불편한 드라마다. 보면 볼수록 찝찝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영화 <부당거래> <부러진 화살> <도가니>를 동시에 보는 듯하다. 분노가 치밀고 슬픔이 밀려 온다.
이 드라마에서 서울 여의도 63빌딩이 60층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 지상 60층, 지하 3층으로 돼있고 지상과 지하를 합쳐 ‘63빌딩’이란 명칭이 붙여졌다니 감추려고 한 진실이 아닌데도 알고 나니 개운 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감춰진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면 그 쾌감은 어떠할까. 보이는 것과 진실은 다르다는 것, 바른 권력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악인과 같은 상황이 숨겨져 있다는 진실에 한없이 두렵다.
권력 앞에서 한 가정이 힘없이 무너졌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악랄한 권력과 맞서는 아버지의 진실을 향한 추적이 거듭될수록 드러나는 진실과 그 진실이 수반하는 고통과 희생은 양산될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밝히려는 추적자와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우리들. 그래서 드라마 추적자를 보는 것이 힘겹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관계없이 득세하는 이 ‘끔찍한 세상’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들. 드라마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자조와 함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기엔 현실은 너무 암울하고 ‘현실성’은 너무 짙다.
진실을 드러내는 파수꾼
썩은 물을 생명수로 바꾸려는 파수꾼
파수꾼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정화되어
만민이 감로수를 마시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