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서 이상봉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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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 이상봉을 만나다
  • 황의관 정주기자
  • 승인 2012.07.24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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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절친 순창이 낳은 한국
챔피언복싱에 젊음을 바친 남자 이상봉을 만나다.

이상봉.(사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이상봉이라는 이름을 치면 유명한 디자이너, 기업인, 조각가, 의사 등 여러 인물이 검색된다. 그러나 기자가 만난 사람은 ‘복서’ 이상봉. 순창 출신으로 1975년부터 1980년도까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남자. 젊은 시절 복싱에 모든 것을 맡기고 누구나 겪는 실패와 좌절 속에 호주로 떠났다가 이제는 고향인 순창으로 돌아온 그를 만났다.

내 젊음을 바친 복싱

프로야구, 수영, 피겨스케이팅 등 요즘 인기 있는 스포츠 가운데 ‘복싱’이란 두 글자는 저만치 멀어져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권투’하면 전 국민이 열광할 만큼 그 관심이 대단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인기 넘치는 ‘권투만 하면 편히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그는 처음 링 위에 올랐다고 했다.

“동아체육관 알죠? 김현치 관장님이 나를 가르쳤어요. 그때부터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죠. 피나는 연습의 연속이었어요. 무조건 연습, 열심히 연습하는 게 내 전부였어요.”

20대 중반, 젊음을 복싱에 바치며 그렇게 실력을 쌓아가던 그는 드디어 1977년도 밴텀급 신인왕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한국 챔피언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거두었다.

“신인왕이 되었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반겨주고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다른 선수들은 신인왕에 오르면 고향에서 꽃다발을 들고 올라온 이도 많고 고향 마을 전체가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는데 조금 서운하기는 했지요.” 30년이 훌쩍 지난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잠시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평생 남을 상처를 안고

때리고 맞고 어느 한 곳 성한 데 없이 쥐어 터지는 게 일이었다는 그의 손으로 눈길이 갔다. 손 등 위로 뼈가 튀어나온 듯 불쑥 솟아있었다. 외국인 선수와의 시합 중 입은 부상이라고 했다. 시합 중 손가락 뼈가 부러졌는데 상대 선수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끝까지 이 악물고 시합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경기 중에 입는 부상도 겪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이보다 더 힘든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체중조절. 밴텀급 선수는 52~56킬로그램(kg)의 몸무게를 유지해야만 한다. 시합을 앞두고 선수들은 체중 관리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박종팔 선수와 함께 외국에서의 시합이 있었어요. 체중 조절을 일주일 동안 하고 있는데 자꾸 외국 선수들이 시합 일을 미루는 거예요. 계속 그렇게 미뤄지고, 미뤄지고…. 일주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체중을 맞춰놓으면 또 미루고 그러다 보니 기력이 쇠약해져 우리 둘 다 패하고 말았죠. 그 뒤로 선수 생활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복싱을 시작하면서도 극한의 고통을 겪은 그는 한참 때에도 편치 못했고 복싱을 내려놓으면서도 고통의 연속이었다.

“김득구…마음이 짠하죠”

<나는 그를 만나고 나서야 이 영화의 대사를 쓸 수 있었다. 이상봉씨는 김현치 관장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그는 모범생 스타일이었고 김득구는 좌충우돌하는 스타일이었다. 애인과 약혼식을 할 때도 김득구는 이상봉씨에게 물었다고 한다. ‘약혼식을 해 말어? 네가 결정해 다오’ 그런 관계였다.> 비운의 복서 김득구를 그린 영화 <챔피언>을 만든 곽경택 감독이 2002년 언론사와의 인터뷰 중 한 이야기이다.

곽경택 감독은 <챔피언>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호주까지 찾아와 그에 대해 물었다고 했다. 사업 실패 후 홀로 호주에 기거하고 있던 이씨는 그가 알고 있던 ‘김득구’에 대한 이야기를 곽 감독과 나누며 영화에 등장하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소스를 제공했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물어보더라. 복서로서의 몸가짐, 습관, 즐겨 불렀던 노래나 말투, 그가 평소에 갖고 있던 고민거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씨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짠하다”고 말하며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아들이 아마 서른 즈음 됐을 거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잠깐 소개되는 것을 보긴 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잘 컸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면서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였는데…”하고 말끝을 흐렸다.

저 푸른 초원위에 집을 짓고

동계면 신촌이 고향인 그는 현재 적성 구남에 한옥으로 보금자리를 짓는 중이다. 힘든 시절 고난을 겪고 이곳저곳 돌고 돌아 마침내 그를 품은 것은 고향 순창이었다.

“복싱선수만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이 순수해요. 남들이 다 자기만 같은 줄 알고 바보같이 믿다가 모든 걸 잃었습니다.”

복싱을 그만 둔 뒤 사업을 시작했지만 아이엠에프(IMF)와 사기 등 악재가 겹치며 수렁에 빠진 그는 홀연히 호주로 떠났다. 이때 가족들은 서울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사람이 싫었다”는 그는 호주에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와 새 삶을 살았다. 열심히 일 해 여유가 생기자 이제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선배들도 있고 후배들도 있는 고향에서 앞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의 얼굴에 젊은 시절 패기 넘치는 복서의 모습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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