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 아이들 속에는 국경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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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 아이들 속에는 국경이 없어요"
  • 마쯔가미 노리에
  • 승인 2013.01.1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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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마쯔가미 노리에 (44ㆍ순창읍 교성ㆍ일본)
평화통일지도자 전라북도협의회 주최 다문화가정생활수기 금상작

 

저는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자연이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농사를 짓는 아빠 뒤를 따라 산과 강, 논과 밭을 뛰어다니면서 자랐습니다. 아빠는 그런 나를 각별히 예뻐하시고, 학교도, 결혼 후에도 부모님의 눈에 닿는 곳에 두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소원대로 히로시마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시마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통일교와 인연이 되어 신앙을 시작하게 되고 한국인 남편을 만났습니다. 아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갑자기 제멋대로 시집간다고 하니 아빠는 심하게 반대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의 굳건한 결심은 부모님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996년 2월 결혼하고 처음 한국으로 온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설날 구정 연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오자마자 ‘민족대이동’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남편은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설 명절 연휴가 시작되자 시댁이 있는 전라북도 순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작은 여행 가방에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고속버스를 탔는데 “이것 정말 고속도로?”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거북이 운전을 하니 새벽돼야 시댁에 도착했습니다.
재래시장터에 위치한 시댁에는 어머님과 형님부부가 살고 계셨습니다. 도착했을 때가 어두운 새벽이었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아침에 현관문을 열었더니 눈앞에 재래시장 풍경이 펼쳐지고 보는 것들 등 모두가 신기하게 느꼈습니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어서 시장 공중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놀랐지만 더욱 나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날이라서 아침부터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남편의 머리를 감고 싶다는 말을 듣고 어머님께서 마당에 나가셨습니다. ‘무엇을 하러 나가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잠시 후 “머리 감아라”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궁금해서 나도 밖으로 나가봤더니 큰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가랑눈이 내리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당에서 머리를 감는 남편의 모습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수도꼭지를 돌리기만 하면 차가운 물은 물론 따뜻한 물도 나오는 생활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순창에서의 생활은 타임 슬립을 한 것 같았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는 나에게 어머님께서 “너도 감을래?”하고 하셨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렇게 나의 한국 생활은 시작부터 한 마디로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지만 실제 생활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인천에서 생활하다가 아이엠에프(IMF) 경제위기로 남편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도시생활이 어려워지자 1년9개월 동안 지내며 정들었던 인천을 뒤로한 채 남편 고향인 순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인천에서 내려오느라 그리 돈이 넉넉지 못했던 우리는 아주 좁고 방은 하나에다 욕실도 없는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언어 차이 때문에도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시골로 이사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힘들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 근처에 사는 것이 도시생활보다 더욱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혼자서 여섯 명의 아이들을 키워 오신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같은 여자로 정말 존경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옆에 없었으면 어머니의 가한 생활력을 느껴보지 못할 뻔했습니다. 밖에 나가시면 절대 빈손으로 돌아오시지 않는 어머니. 용돈을 벌기 위해 폐지를 모으시고 시장에서 배추나 무 잎을 주워 오실 때는 무엇을 하시는지 궁금했는데 다음날 된장국의 재료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사니는 무엇보다 남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아무 부족함 없이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며 자랐던 나는 너무 가난해서 일찍 일을 시작하고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한이 맺힌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머니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우리도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과의 정이 점점 깊어가게 되었습니다.<중략>
최근 몇 년간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면서 정부의 지원이 늘고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이 참으로 다양해졌습니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순창군에서도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생겼고, 저는 그 중 다문화 원어민강사 양성교육에 참여해서 일본어방과후지도사의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딸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다문화연구학교로 지정돼 이중언어교실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기회도 생겼습니다. 왕초보 강사가 된 나의 수업연습 장소는 늘 우리 집이었고 우리아이들이 학생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항상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우리 소중한 가족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강사로 일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일본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주 행복하고 감사한 일입니다.<중략>
한국 사람인 아빠와 일본 사람인 엄마가 만나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 속에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경이 없고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도 좋아하고 일본도 좋아합니다. 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한국과 일본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씨앗이 되고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세계평화에 연결된다고 믿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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