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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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이제!
  • 김슬기 기자
  • 승인 2013.12.16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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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외길 인생 풍산이용원 이수영 이발사

▲40여년 변함 없는 자리에서 처음 그 간판 그대로 손님들을 맞고 있는 풍산이용원.
비 내리는 월요일, 수더분한 머리를 툴툴 털며 들어서는 조장익 씨. 끝내 나이는 알려주지 않던 그는 풍산면 송두마을에 살고 있는 청년이다. 잠금장치라고는 작은 ‘쇳대’ 하나뿐인 풍산이용원은 그가 시골에 내려온 지 2년째 단골로 찾는 곳. “내일 방재단에서 견학 간다고 하는데 머리가 지저분해서 좀 정리하러 왔어요. 시원하게 잘라주세요”하고는 ‘털썩’ 의자에 앉는다. 어두컴컴했던 실내에 등이 켜지고 따뜻한 난로에도 불이 당겨지자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의 주인공 이수영(67ㆍ풍산 반월) 이발사가 하얀 작업복을 꺼내 입는다. 돋보기 너머로 화려한 손놀림, 40년 묵은 이발 전문가의 솜씨가 발휘될 시간이다.

▲조장익씨의 머리를 다듬고 있는 이수영 이발사.
풍산면 터줏대감 이발사
1974년 문을 연 ‘풍산이용원’은 풍산에서 나고 자란 이는 누구나 아는 곳이다. 강산이 세 번은 변한다는 39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여느 미용실처럼 화려한 조명이나 헤어 제품도 없고 심지어 온수기도 없지만 그 시절이 그립고 그 사람이 그리운 이들이 꾸준히 찾는 곳. 아버지가 생각날 때면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곳이다. 
의자, 창문, 거울 틀, 간판, 개수대까지 모두 처음 그대로다. 닳아 없어지는 면도 솜과 가위 날만 새로 갈아온 지 39년, 지역의 대소사는 기본으로 꿰고 있는 이수영 이발사는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할 동안 한우물만 파왔다.
10일, 20일, 30일. 한 달에 세 번 그만의 독특한 휴일을 피해 지난 9일, 이 씨를 만났다. “나 같은 사람을 왜 신문에 내. 남들이 욕하지. 학벌 좋고 잘난 사람들이 신문에 나오는 것 아니야? 그만 가”하며 30분 동안의 실랑이 끝에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을 노려 끈질기게 그의 인생을 듣는다.

중은 제 머리 못 깎나

이수영 이발사의 작업시간은 기본이 1시간이다. 손님이 의자에 앉으면 머리 손질부터 시작해 눈썹 손질, 면도, 코털 손질까지 앉기만 하면 ‘동안’이 되어 일어난다. 전기면도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빗과 가위, 면도날, 면도거품 묻힌 붓이 전부다. 난로 위에 슥슥 붓을 소독해 손으로 찍어 온도를 재보고 턱부터 이마까지 면도서비스. 이발과 면도가 끝난 뒤에는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긴다. 여느 미용실처럼 의자에 누워 목을 뒤로 젖히는 게 아니다.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하면 가스불로 데운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어 ‘조롱’이라 불리는 바가지로 머리를 감는다. 머리 감기를 마치면 촘촘한 빗으로 드라이를 해주는데 드라이 전용 빗이 아닌데도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씨는 “처음에는 손님들 면도하다가 베기도 하고 실수도 많았지. 면도 할 때는 귀밑하고 코 밑 인중이 가장 어렵고 조심스러워”라고 말했다.
남자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나이가 지긋한 할머님들이 오실 때도 있단다. “읍내 미용실까지 나가기 힘드신 할머니들이 커트하러 오실 때가
있었다. 파마는 못해드려도 커트는 해드리곤 했다”는 그는 “어린 아이들은 예전엔 빡빡머리로 많이 깎았다. 이 동네에 내 손 안 거친 아이들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문득 든 궁금증 “직접 머리도 자르시나요?”라는 질문에 대답은 “앞에만!”이었다. 손이 닿는 곳까지는 직접 머리 손질을 하고 뒷머리만 아내가 잘라준다고. 
 
청춘이 청춘에게
열일곱, ‘이발사’라는 직업과의 인연은 열일곱 청춘에 시작됐다. 어린 나이에 읍내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면허를 땄다는 그는 강원도 연천에서 군대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곧바로 ‘이발사’로 일 해왔다. 1년 동안 직원으로 일하다 사장님으로 풍산이용원을 경영해온 뒤로는 거울 속 깔끔해진 모습에 웃음 짓고 돌아가는 손님들 보는 낙으로 살아왔다고.
면단위의 작은 이발소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방방곡곡 소문난 풍산이용원에는 단골도 가지각색이다. 이웃한 금과면 사람들은 물론 곡성군 옥과면에서도, 광주, 서울처럼 큰 도시에서도 “아저씨~”하고 들어온다고.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이발소에 왔던 고향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많은 단골들 가운데 가끔 생각나는 사람은 의외로 젊은 청년이란다. 이씨는 “읍내 사는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 아버지 함자가 신 정자 식자여. 저기 경기도 파주에서 일하는데 고향 올 때마다 전화해서 안부도 묻고 머리도 하고 가고 그래. 그렇게 젊은 청년이 이런 낡은 이발소를 왜 그리 잊지 못하고 각별하게 챙기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기왕 하는 것 야물딱지게
날 때부터 정해진 인생은 없는 법. 한약방을 하시던 아버지 밑에서 이발사라는 직업을 갖기까지 그리고 40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도 그의 인생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와 같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오니 손에 있는 건 달랑 이발사 면허뿐이어서 이 길을 걷게 됐다”는 이 씨의 이야기는 아내 박남순(63) 씨와의 연애결혼 이야기로 흘러갔다. 행복했던 그 시절이야기에 웃음이 반짝, 가슴에 묻은 딸 이야기에 그늘이 잠시 비쳤다.
“처음부터 이 일이 천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기왕 하려면 야무지게 하자. 설렁설렁 하지 말고 야물딱지게! 하고 다짐하면서 살아왔어.” 그는 “80~90년대에는 손님들도 많았다. 마흔 둘 젊은 시절에는 얼른 돈 모아서 집 살 생각에 매일 통장에 저축을 하는데 보고 또 봐도 집 살 돈 ‘반의 반’도 안 됐다. 어려워도 그땐 참 열심이었다. 별별 일들이 많았다”라고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그였다.
소문난 잉꼬부부이기도 한 이 씨 부부는 매일 저녁 풍산면 일대를 걸으며 건강한 노후를 준비해가고 있다. 낮에는 이발소에서, 저녁엔 길에서 부부를 만날 수 있다. 이수영 씨는 “마음이 즐거우면 뱃속 창자도 즐겁다. 세상 아무리 잘해도 근심 걱정이 없을 수는 없다. 인생살이가 다 그런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채 그저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했다.
머리가 닿을 듯한 출입문 너머로 손 흔드는 이수영 이발사. 그의 가위질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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