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대표는 서울시 을지로에서 앵글토탈시스템을 갖춘 회사를 경영하며 재경쌍치면청년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쌍치시산초 총동문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차기 재경순창군청년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상경해서 가정을 이루기까지의 사연
=말(馬)이 슬피 울어 변(재난)을 막아 주었다는 쌍치 철마봉(鐵馬峰) 아래 조그만 동네의 평범한 농사꾼의 6남 2녀 중 3째 아들로 태어나 시산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의 완강한 유학 권유로 상경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고향으로 내려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농사를 도우며 공부해 상업부기 등 회사 취업 준비를 나름대로 마치고 어렵게 여성 핸드백과 어린이용 가방 제조공장인 ‘미도물산’ 총무과에 취직돼 다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큰 형님과 작은 형이 세상을 일찍 떠나시는 바람에 장남 아닌 장남으로 집안을 챙겨야 했기에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했다. 입사 10년 만에 총무과장이 되었다. 당시 거래처 회사의 경리과에 다니던 서울 용산 출신 나보다 6살 어린 아내를 중매로 알게 되었고 29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당시 인기 있던 정치인 박주천 국회의원의 주례로 주위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면서 청운의 꿈을 이루는가 싶었는데 회사가 갑작스런 부도로 문을 닫았다.
▷병마(중풍)와 원청회사 부도를 극복하다
=회사 부도로 신혼의 단꿈은커녕 호구지책을 염려하던 인고의 나날을 보냈다. 어렵사리 당시 썩 잘 나간다는 의류업체 ‘오리지널 리’의 협력업체로 등록하고 의류봉재공장을 운영하게 됐다. 밀려드는 일감을 처리하려고 밥 먹듯 철야작업을 한 탓인지 33세에 청천병력 같은 중풍을 맞았다. 활동을 하면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 특이체질로 갖은 고통 속에서도 살려고 버둥댔지만 원청회사가 또 부도가 나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치 앞이 보이질 않았다. 전전긍긍 하루하루를 애태우며 수개월 동안 충청도 음성과 진천지역 낚시터와 서원을 찾아 다녀다. 여유가 아닌 재기를 위한 몸부림으로 고뇌에 찬 시간을 보냈다. 비바람 부는 악천후 속에서 무박 2일 동안 우리 부부는 지리산을 등반하는 고생을 일부러 했다. 극한 상황을 함께 이겨낸 끝에 마침내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앵글’을 만나 일생의 전환기를 맞다
=우리 부부는 벼랑 끝 탈출을 위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앵글이라는 색다른 업종을 소개받고 벼랑 끝 인생에서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됐다. 이름도 특이했지만 왠지 마음이 끌렸다.
지금으로부터 17년전 그 당시에는 나무로 만든 선반이나 진열대의 구조가 아닌 철재로 간단히 조립할 수 있어 사업 전망도 밝아 보였다. 여기저기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어느 날 고시원이라는 업소가 한 군데 두 군데 생겨나고 이윽고 수십 수백 곳을 시공해 대박을 만났다.
하루가 짧을 정도고 몸이 열개라도 부족했다. 그야말로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수년동안 오가며 저런 건물을 하나 사야겠다는 그 빌딩입구에 걸린 매물안내문이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계약금 10%도 없었지만 이런저런 대화 끝에 흔쾌히 매매계약서를 써준 분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서울 생활을 돌이켜 보면?
고향 떠나온 향우들의 타향생활이 대동소이하겠지만 호구지책이 먼저였던 가난했던 시기에는 고향 선ㆍ후배들의 애ㆍ경사나 향우회 모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상경한 30년 세월, 언제나 고향이 그리웠다. 어느 정도 사업 기반이 잡힌 10여 년 전부터 틈만 나면 고향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선ㆍ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많은 힘과 용기를 얻었다. ‘순창’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찡하고 가슴이 뿌듯해지며 용기와 힘이 샘솟는 듯했다. 재경순창군청년회 활동 덕에 차기회장에 선출됐다. 굳이 비유한다면 비빔밥은 여러 재료들이 어울려질 때 더욱 고소하고 깊은 맛을 내는데 내가 바로 하나의 고명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잘 섞이고 섞이는 재경순창군청년회가 되도록 열과 성을 다하련다. ‘순창’은 나의 영원한 힘의 원천이다. 갑오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