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금과 내동교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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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금과 내동교회 100년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3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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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모습.

금과 내동교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아 내동교회 100년사를 발간한다. 내동교회는 1920년 교회 창립 후 100여 년 동안 목사 18명, 전도사 5명, 장로 20명 등 40여 명이 넘는 목회자를 배출했고 금과 면민 복음화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어 왔다. 
일반적인 교회사는 현세 교인들과는 무관한 옛 기록인 경우가 많아 성도들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내동교회 100년사는 100년간의 교회 부흥 역사를 가감 없이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도 교회역사 실록으로 명명했다. 금과 내동교회 100여 년 역사를 둘러본다.

●내동교회 설립자 설만옥 장로
금과면 내동리에서 출생한 설만옥은 순창설씨 61세손이다. 곡성 출신 김해 김씨 가정 무남독녀 김달용 처녀와 혼인 후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극심한 가난이 겹치면서 고달픈 삶을 살았다. 힘겹게 태어난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몇 달을 못 넘기고 저승으로 가버리거나 겨우 첫 돌을 넘기고는 이승을 하직하는 불행이 계속되었다. 조금 자란 아이들도 홍역과 볼거리에 걸려 불덩어리가 되었다가 이내 허망하게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버렸다. 설만옥 부부는 무수히 불공을 드려보기도 했고 날마다 부엌에다 성주신을 모셔놓고 밤낮으로 공도 들여봤지만 금쪽같은 새끼들을 하나도 살려낼 수 없었다. 
1919년 어느 가을, 원쟁이 논에서 일하던 설만옥 부부에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악기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동네 앞 공터에 가보니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서양인 두 명과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한국 남자 한명이 모여서 나팔 같은 악기를 뚜~ 뚜~ 불면서 “야소 천당. 야소 천당” 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한국인 남자는 악기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더니 “야소님을 믿으쇼. 야소님을 믿어야 천당간당께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내동리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온 것이다.
설만옥은 그들에게 "야소가 누구다요"라고 물었다. 이에 선교사는 떠듬거리는 한국말로 “야소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요! 우리가 야소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자녀들도 훌륭한 사람이 된답니다. 그러니 형제님 야소님을 믿으세요”라고 전도했다. 주변에는 나팔소리를 듣고 나온 한 동네의 이도록 씨 모친과 아내, 양봉수 씨 등이 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설만옥은 얼마 전 이도록 씨 모친이 순창읍에서 보았다던 그 야소쟁이가 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화려한 기와집의 복숭아꽃이 만발한 마당에서 먼저 간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행복하게 뛰놀고 있던 모습이 환상처럼 보였다. 북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점점 가슴은 뜨거워졌고 아~ 내가 저 사람들이 말하는 야소만 믿으면 살 것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로 설만옥 부부는 야소 천당의 뜨거운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다. 날마다 그 오묘한 말씀을 되새기는 동안 가슴이 불타오르는 영적 희열을 맛보았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려면 순창읍까지 왕복 네 시간 이상을 걸어 다녀야 했다. 주일날은 기쁨으로 왕래했으나 삼일밤 예배와 새벽 예배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함께 주님을 영접한 이도록 모친과 부인, 양봉수 등 여섯 명이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하고 내동리 550번지 자택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교회 창립 예배 터
설만옥 부부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고 문중에서 파문당하고 부모 집에서 아내와 함께 쫓겨났다. 그 당시 내동리 550번지에는 버려진 흉가가 있었다. 설만옥 부부는 예수 믿는 우리가 귀신쯤이 별거냐며 무너져가는 흉가를 거처로 정했다.
그리고 예수 영접 후에 건강한 아들 설성수를 불쑥 낳자 마을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연이어 아들 셋을 더 낳게 되자 내동사람들 사이에 예수가 영험하긴 영험한 신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1920년 1월 3일 마침내 내동리 550번지 설만옥 집에서 세 가정이 모여 첫 번째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니 이 날이 내동교회 창립일이 되었다. 선교사의 지원도 전도조사의 협력도 없이 순전히 내동 사람만으로 주님을 영접해 첫 가정예배를 드렸으니 자생적이고 독특한 복음의 싹이 튼 것이다. 
이도록은 설만옥 장로의 2기 자택인 620번지의 바로 아랫집인 내동리 619번지에 살았고 양봉수도 설만옥 장로집과 가까운 아랫동네에 살았기에 자연스레 합력과 찬양의 동반자가 되었다.
 

●첫 번째 성전 장막 교회
1921년 8월 5일 내동리 505-1 이도록의 밭에 서너평 되는 움막 예배 처소를 짓고 내동교회라 명했다. 덕석과 볏짚으로 지은 장막 교회는 비좁고 어두웠으며 한 해가 지나면 볏짚이 썩기 때문에 매년 수리를 해야만 했다. 예배시간이 되면 호롱불을 켜야 했고 여름철은 무더위와 습기, 겨울철은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세 가정은 속히 예배당을 건축하게 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두 번째 성전 초가집 예배당 건축
장막 교회에서 바친 헌금을 모아 1922년 5월 1일 내동리 630번지에 교회 건축용 대지 32평을 구입했다. 그러나 건축자금이 없어 8년간을 더 기다린 후인 1930년 3월 15일이 되어서야 두 번째 성전인 초가집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1930년 4월 설만옥 장로는 세례를 받고 영수가 되었다.

●금과교회 분립
1950년대 초에 장년과 유년 합계 성도가 85명으로 부흥해 1954년 3월에 금과교회를 개척해 분립시켰다. 

●소금 장사와 세 번째 성전 함석교회 건축
교회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1953년까지 교회가 소금 장사를 해서 남은 이익금으로 연화촌 뒤쪽에 논 네 마지기를 구입했다. 그리고 소금 장사를 계속해서 모은 자금으로 내동리 들샘 아래에 교회 재정용 논 두 마지기를 더 구입했다. 교회 논의 소출과 소금 장사를 해서 얻은 이익금으로 1960년 4월부터 동년 10월까지 6개월 동안 32평 대지에 건평 28평 규모의 세 번째 성전인 함석지붕 교회를 건축했다.

●매우리에 네 번째 성전 건축
1970년대에 이미 장년 75명을 포함해 교인수가 192명으로 계속 부흥했으나 내동교회 부지가 협소해 증축이 곤란하므로 면 소재지로 이축키로 결의했다. 교회 이전용 부지로 매우리 490-9번지 대지 200평을 구입했다. 1976년 2월 10일 착공 예배를 드렸고 75일 후인 1976년 4월 26일에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금과중앙교회로 개칭했다. 그러나 교회 내부 시설을 완전히 다 갖추는 데 무려 9년 2개월이나 소요되었고, 1999년 6월에야 현재의 사택이 신축돼 목회자의 안식처가 완비되었다.

●도약 결단기
1990년대 초반부터 목회자와 성도 간 신앙관 차이, 탈 농촌 현상으로 인한 상주 인구수의 감소 등의 이유로 성도 상당수가 떠나갔다. 내동교회는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미래 100년을 위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17년에는 후임 시무자를 초빙했고, 고향 교회를 돕기 위해 출향 교인이나 도시 교회로부터 후원 헌금이 답지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설만옥 장로의 순종하는 삶을 보고 자란 장손 설동화는 고향 교회로 돌아와 성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예배를 마친 신도들과 교회 모습.
▲1960년대 후반 종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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