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24) 고구려 제20대 장수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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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24) 고구려 제20대 장수왕①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6.3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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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최고 외교 전략가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394~491, 재위 412~491)은 광개토대왕의 태자로 휘는 거련(巨連)이다.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18세에 왕위에 올랐다. 98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붙었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명성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평양으로 천도해 남진정책을 추진하고 중국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맺고 한 세기 가까이(재위기간 79) 고구려 전성기를 이어갔다.

광개토대왕 사후 고구려는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 대에 양산된 공신들은 대국 형성에 기여한 자신들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복속된 지역 세력도 틈만 보이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새로 중원의 강자로 떠오른 북위도 골칫거리였다.

수두룩한 난제에 둘러싸인 장수왕은 먼저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워 아버지의 업적을 기렸고, 주변국에 사신을 보냈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고, 한족의 남중국은 동진(東晉)ㆍ남송(南宋)ㆍ남제(南齊)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고, 이후 남송ㆍ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북중국 강자 북위에도 사절을 파견해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유목민족 유연(柔燕)과도 관계를 가졌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내실을 다지며 427(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했다. 평양 천도 과정은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사료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외교문서다. 개로왕은 474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주기를 요청하면서 장수왕이 죄를 지어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고, 대신과 호족에 대한 살육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고 언급했다. 과장이 섞여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장수왕 재임 초기 고구려 내부에 정치 변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통해 국내성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것 같다.

장수왕은 주체적이며 당당한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436(장수왕 24) 북위의 공격으로 북연(北燕)이 멸망할 때 장수왕은 발 빠르게 군사를 파견했다. 고구려군은 북위군보다 한발 앞서 북연 도읍인 화룡성(和龍城)에 진입해 무기고와 성 안을 약탈하고, 북연왕 풍홍(馮弘)과 백성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철수했다. 눈앞에서 북연 왕을 빼앗긴 북위는 분개하며 항의했지만 고구려의 군사력에 부담을 느껴 군사적 공격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런데 고구려로 넘어온 풍홍이 과거 황제였다는 자만심으로 행패를 부리자 장수왕은 풍홍의 태자를 인질로 잡고 시중드는 인원도 몰수해버렸다. 풍홍은 장수왕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남송(南宋)에 망명을 요청했다. 남송은 풍홍을 맞이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에 비용을 대라고 요구했다. 이에 장수왕은 남송 요구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보내 풍홍과 그 자손 10여 명을 살해해버렸다. 그러자 남송의 사신 왕백구가 자신이 끌고 온 군대를 동원해 풍홍을 살해한 고구려 장수를 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했는데, 장수왕은 사신 왕백구를 붙잡아 송으로 압송했다. 남송은 고구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그를 감옥에 가두고 한참 후에야 석방했다.

장수왕은 형식상 북위나 남송에 조공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그만큼 강한 군사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489(장수왕 77)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이 남제 사신이 나란히 앉아 대우 받은 점, 장수왕이 사망했을 때 북위 효문제가 평양성을 향해 상복을 입고 애도를 표한 것으로 보아 장수왕대 고구려의 외교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장수왕은 북위-북연-유연---고구려를 둘러싸고 전개된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공을 외교수단으로 최대한 이용하면서 국가 이익을 극대화시킨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외교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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