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33) 복흥 금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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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33) 복흥 금월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0.2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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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월리는 복흥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평(錦坪)칠립(漆立)대각(大角)마을을 합해 금월리(錦月里)라 했다. 북쪽은 지선리, 동쪽은 정산리, 남쪽은 어은리, 서쪽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와 접하고 있다. 20211022일 기준 인구는 79세대, 137(남자 61, 여자 76)명이다.

 

마을 유래

대각마을은 금월리에 속해 있는 세 마을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다. 대각산(528m) 아래 동남쪽에 있어 대각산 지명을 그대로 따왔다. 400여 년 전에 김 씨전 씨장 씨천 씨 등 4성이 처음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며, 그 후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옛날에 마을 안에 사찰이 여럿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기와 조각 등 그 흔적이 출토되기도 한다.

칠립마을은 350년 전 설 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대각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산의 형상이 옻칠을 한 갓 모양으로, 장군대좌(將軍大座)의 상대성 지명으로 옥관(玉冠)이란 말이 변음되어 옻갓이 되었으며, 후일 한자 표기를 하면서 옻 칠자를 써 칠립(漆笠)이라 했다가 칠립(漆立)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강두(江頭)마을은 대각산 남쪽 한 지맥이 동쪽으로 내려오다 능선 남쪽에서 어은리와의 사이에 형성되었다. 마을 앞뜰이 비단 자락 같은 들이라 하여 원래 금평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 강두마을로 불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섬진강 발원지라 강머리라 부르던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강두가 되었다고도 하고, 마을 후룡의 형상이 배가 머무른 형상이므로 물과 부두가 있어야 하므로 강머리라 했다고도 한다. 전라북도 산림박물관을 복흥으로 유치하는데 크게 기여한 박상우 전 농림부 차관이 이곳 출신이다.

대각마을
대각마을
칠립마을
칠립마을
칠립마을 표지석
맷돌로 만든 칠립마을 안내판
강두마을
강두마을

 

대각마을 짐대제

금월리 대각마을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룻날 전통 방식으로 나무 짐대를 세우고 있다. 현재 나무로 짐대를 세우는 마을은 복흥면 대각마을과 석보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무형 문화유산이다.

대각마을에서 오릿대를 세우게 된 동기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마을 앞산 무적바위에 물이 흘러내리고 햇빛이 반사해 마을에 비치면 화재가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물에서 노는 오리 조각을 장식해 장대 위에 올려놓고, 무적바위에 물이 흘러내리면 오리가 달려들어 물을 먹어 버려 마을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 오리 짐대를 무적바위를 향해 세워 놓은 것이다. 물오리로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하는 압승 기능의 짐대라 할 수 있다.

1950~60년대에는 짐대로 사용할 소나무를 구하기 위해 장성 백양사까지 가서 구해온 적도 있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대각마을 짐대제는 새마을운동이 실시되던 1970년부터 3년 동안 짐대를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짐대를 세우지 않자 마을에 자꾸만 화재가 발생해 많은 피해가 있게 되었고, 그래서 중단했던 짐대를 다시 세우기 시작해 현재까지 짐대제를 지내고 있다.

대각마을 짐대
대각마을 짐대

 

대각마을 선돌

대각마을 입구 모정 옆에 선돌 1기가 있다. 크기는 높이 120, 25, 두께 28이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본래 마을 앞뜰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1970년대에 경지정리하면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마을 앞 들 가운데 풍수비보용으로 세운 것이었으나 지금은 용도를 상실하면서 단순한 선돌이 된 것 같다.

대각마을 선돌
대각마을 선돌

 

돌다리와 정자나무 전설

순창향지(1998)에는 대각마을 서남쪽 능선으로 거대한 귀목나무가 보비용으로 많이 서 있었고, 마을 앞에는 수정자나무와 암정자나무가 서 있어 매년 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냈다. 그런데 1928년경에 일본인들이 군용 선박을 제작한다는 미명 아래 당산나무를 베어 갔다. 그러자 그해 21일 이만석 씨 집 뒤에 있는 바위에서 새빨간 물동이와 같은 불덩어리가 동서남북으로 날아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 불이 붙어 온 마을이 일시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이때에 암정자나무가 서 있는 쪽으로는 불이 건너오지를 않았고 수정자나무에 불이 붙어 며칠 동안 타면서 암정자나무는 무사하고 이쪽 마을은 전혀 옮겨 오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현재 돌다리와 암정자나무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대각산 황앵탁목 명당과 기정진 출생설화

대각산(大角山528m)은 복흥면 금월리지선리와 전남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북쪽 자락에서 복흥 쪽으로 뻗은 산의 모습은 장군이 쓰던 투구를 벗어 놓은 형상이다. 대각산은 사방으로 뻗어내려 풍수지리상 명혈이 많은 곳이다. 남쪽은 전남 장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꾀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형상인 황앵탁목(黃鶯啄木) 명당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성군에 살았던 기재우(奇在祐)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복흥면 하리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풍수지리를 배운 뒤, 부모 묘소를 황앵탁목 명당에 모셨다. 그 뒤 기정우가 결혼해 큰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길쌈할 때 쓰던 뾰족한 쇠가락이 아이 눈으로 떨어져 한 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부인과 가족들의 걱정과 달리 기재우는 황앵탁목 명당은 귀한 사람이 나오면 한쪽 눈을 실명할 것임을 미리 알고 오히려 부모님께 효도했다는 기쁨으로 희색이 만연했다. 이러한 출생 일화를 남긴 사람이 바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다.

그는 서경덕이황이이(조선 전기), 이진상임성주(조선 후기)와 함께 조선시대 6대 성리학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19세기 중반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우며 출현한 서구열강 앞에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위정척사(衛正斥邪) 논리를 최초로 설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정진은 복흥면 동산리(일명 조동, 구수동)에서 출생해 성장했으나, 양친이 돌아가신 후 아버지 고향인 장성군 하남(황룡면 아곡리)으로 이사했다. 순창에서 태어났음에도 장성 출신인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는 기 씨(奇氏) 집성촌이 장성이라는 이유에서다.

대각산
대각산

 

도술 부리다가 혼 난 도인

대각산 자락에 대각사라는 가람(伽藍)이 있었다고 한다. 한 도인이 대각사 밑에서 기거하면서 도를 닦고 있었다. 10년 동안 마을 한쪽에 터를 마련하고 도를 닦고 있어서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이 도인과 친구가 되었다.

10년이 넘도록 친구로 만나면서 오고가는 처지가 되니 마을 사람들이 그 친구에게 도인의 도술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부추겼다. 사실 그 사람도 도인인 친구의 도술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도인에게 친구로서 간청했다.

도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럼 자네는 내 뒤에 꼼짝 말고 서 있게. 내가 백암산무등산대각산 신령님들을 모셔오겠네하였다. 도인이 주문을 외우자 갑자기 바람이 일고 휘파람 소리가 요란하더니 주위가 어두워졌다. 곧바로 대각산 신령이 들어오고 백암산과 무등산 신령도 들어섰다. 살펴보니 대각산 신령이 나이가 제일 많았고, 무등산 신령이 제일 젊었다. 세 신령이 모두 도착하자 도인은 아무런 일 없이 세 신령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산신령들은 자신들이 도인의 도술 시험에 이용당한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수도하는 사람이 아무런 목적 없이 도술을 함부로 부려 산신령을 부른 것은 아주 못된 일이라 하면서 산신령들은 이 도인의 혼을 가두어 버리고 가 버렸다. 도인 뒤에 서 있던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혼절했다가 얼마 후에 깨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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