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숨겨진 이야기(9) 구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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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숨겨진 이야기(9) 구암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2.0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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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 구암사, ‘조선후기 불교계 서울대학교’
추사 김정희가 짓고 쓴 백파 비문
추사 김정희가 짓고 쓴 백파 비문

 

구암사(龜岩寺)는 복흥면 봉덕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호남정맥 주봉인 영구산(靈龜山, 현 도집산·都集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구암사는 조선후기 최고의 승려학당으로 불교계 서울대학교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당대 불교계 대표 석학들이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불교학의 맥을 이어갔다. 조선후기 불교 대강백이었던 설파(雪坡)로부터 시작해 백파(白坡) 긍선(亘璇), 설두(雪竇) 유형(有炯), 설유 처명,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으로 이어지는 불교계 석학들이 구암사에서 공부했다. 당시 불교계 가장 큰 쟁점이었던 삼종선(三種禪) 논쟁이 벌어진 곳도 구암사였다.

 

설파 상언, 구암사 크게 일으켜

 

구암사가 사세를 크게 일으킨 것은 영조 때 화엄 종주인 설파(雪坡) 상언(尙彦·1707~1791)스님이 머물면서부터이다. 설파는 조선시대 화엄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고승이다. 호는 설파(雪坡), 법명은 상언(尙彦)이다. 속성은 전주이씨며,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부모를 여읜 뒤 19세에 선운사로 출가했다.

구암사에서 선강법회(禪講法會)를 열어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로부터 100여 년간 화엄 종맥의 법손이 계승되었다. 당시 구암사는 전국 굴지의 사찰로 각처에서 운집한 승려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백파 긍선과 삼종선 논쟁

 

백파(白坡) 긍선(白坡亘璇·17671852)의 속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영조 43(1767)년에 무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파이고 긍선은 법명이다. 12세에 출가해 선운사(禪雲寺) 시헌장로(詩憲長老)에게 배웠다. 뒤에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설파(雪坡) 상언(尙彦)에게서 선()의 종지(宗旨)를 받았다. 이후 구암사(龜巖寺)로 돌아와 회정(懷淨)의 법통을 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눌려 침체된 상황에서 불교계가 활력을 찾는 계기가 된 논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삼종선(三種禪) 논쟁이었다. 이 삼종선 논쟁의 근거를 제시한 인물이 백파이다.

백파는 임제(臨濟·~867, 당나라 선승)의 삼구(三句)를 선문의 표준으로 삼고, 이것을 기준으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의리선·여래선·조사선으로 선법을 분류해 삼종선(三種禪) 이론을 주창하고 나섰다. 의리선(義理禪)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수준의 선을 말하고, 여래선(如來禪)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선으로 소승불교에서 행하는 선이 여기 해당한다. 조사선(祖師禪)은 가장 차원 높은 단계의 선법(禪法)인데, 중국·한국의 역대 조사(祖師)들이 실천했던 선법이다. 화두(話頭)를 들어 의심을 일으켜 번뇌 망상을 없애 버리는 선법이다.

조사선에 해당하는 제1구의 도리를 얻으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될 수 있으며, 여래선에 해당하는 제2구의 도리를 얻으면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의리선에 해당하는 제3구를 이해하는 것으로는 자기 한 사람조차 구제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백파의 이론은 기존의 선론(禪論)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면서 선리(禪理)논쟁으로 전개되어 갔다.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논쟁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은 초의선사였다. 초의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지어 백파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삼종선과 이종선 논쟁이 교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여기에 당대 최고 지성이었던 추사 김정희까지 가세해 증답백파서(證答白坡書)’를 통해 백파의 견해를 비판하고 초의의 주장을 적극 옹호했다.

이후 설두 유형(雪竇有炯)이 스승 백파의 선론(禪論)을 재차 설파했고, 축원(竺源) 진하(震河)가 백파와 설두의 논리를 반박하면서 무려 120년에 걸친 불교계 초유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백파가 조선 불교의 선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선문수경(禪門手鏡)이라는 저술에서 이 삼종선을 발표할 무렵 구암사에는 8도의 승려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당대 불교계의 걸출한 고승을 만나보고 지도받기 위해서였다.

1852년 백파가 86세로 입적하자, 추사 김정희는 백파 긍선 비(白坡亘璇碑), 일명 대기대용비(大機大用碑)를 지어 백파를 화엄종주요, 율사이며, 대기대용의 격외선사라고 추앙했다. 양반 계급이던 추사가 불교 승려를 위해 유일하게 남긴 비문이 지금 선운사(禪雲寺) 입구에 서 있게 된 계기도 이 삼종선 논쟁으로 인한 인연 때문이다. 구암사 대웅전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탁본을 떠다가 전시하고 있다.

 

설두 유형, 구암사 선풍 계승

설두(雪竇) 유형(有炯·18241889)은 스승인 백파 다음으로 구암사의 선풍과 학풍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백파를 반박하는 입장에서 저술한 초의선사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우담(優曇) 홍기(洪基)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반박했다. 그것이 선원소류(禪源溯流)라는 설두의 저술이다.

설두는 서관(瑞寬태선(太先)과 함께 화엄의 3대 강백으로 일컬어졌으며, 28세에 백파의 강석(講席)을 이어받아 화엄강주가 되어 20여 년 동안 학인을 지도했다. 그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과 불교사상에 관해 문답을 나누기도 했다. 1889년 가을 구암사로 돌아와 입적했다.

 

석전 박한영, 근세 한국불교 3대 강백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정호(鼎鎬)스님(1870~1948)은 뛰어난 학승(學僧)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세 한국불교의 3대 강백(경론을 강의하는 승려)이었고, 불교계 혁신을 주도한 큰 인물이었다. 1912년부터 구암사에서 수학했고 수년간 인근에 있는 만일사연대암, 정읍 내장사 주지까지 겸무(兼務)했다.

그는 고종 7914, 전북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에서 태어났다. 불명(佛名)은 정호(鼎鎬), 호는 석전(石顚)이다. 한영(漢永)은 그의 자()이자 속명(俗名)이다. 19세 되던 해 금산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정호라는 법명을 받은 이후 백양사 운문암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21세 때 운문암에서 환응(幻應) 스님에게 사교(四敎), 23세 때 순천 선암사로 가서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를 이수했다. 26(1895)에는 구암사에서 설유 스님에게 법을 이어받고, 염송율장화엄을 수학하고, 법통을 이어받아 개강했다.

이때 당호를 영호(映湖)라 했고 석전(石顚)이라는 시호도 갖게 되었다. 이 법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백파 스님에게 훗날 법손 가운데 큰 도리를 깨쳐 나라의 기둥감이 될 재목이 나올 터이니 이 호를 전하라며 전해 준 것이었는데 설유에게 전해져 석전에게 전수된 것이다.

석전은 27(1896) 되던 해부터는 대강백(大講伯)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어 백양사대흥사해인사법주사화엄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청중들의 가슴속에 돈독한 불심을 심어서 그의 강의를 듣고 학인들이 꼬리를 물었다.

39세 되던 해(1908), 서울에 올라와 만해금파 스님 등과 불교유신운동에 참여했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는 만해성월금봉 스님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해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당시 총독부가 이회광 등을 앞세워 조선불교를 일본불교 조동종(曹洞宗)과 통합하는, ‘불교 한일합병의 음모를 분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합류하지는 못했으나 3.1운동 이후 한성임시정부 국내특파원과 전북대표를 맡기도 했고, 조선민족대동단에 합류해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석전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학계와 문화계 전반에도 영향을 미친 지식인이었다.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정인보이능화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다. 특히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때 여러 번 구암사에 와서 석전을 만났고, 8개월 간 머물기도 했다. 만해가 그때 남긴 시가 몇 편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구암폭>(龜岩瀑)이라는 작품이다.

전국의 수많은 문인들도 산골짜기인 순창 구암사에 몰려들었다.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시인 조지훈·신석정·서정주, 청담·운허 스님 등이 석전을 찾아와 지도받던 학인들이다. 최남선이 1920년대에 쓴 유명한 기행 산문집 심춘순례는 그 배경에 박한영의 안내와 지도가 있다.

조지훈·신석정·서정주 이력에 보면 혜화전문학교 수료라고 되어 있다. 혜화전문학교가 들어가면 석전 문하에 있었다는 표시이다. 석전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조선불교전문강원의 교장을 맡았고, 이 강원이 발전해 혜화전문학교가 세워졌을 때 혜화전문학교 학장을 맡았다. 이 혜화전문학교가 후일 동국대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한국 불교학의 요람인 동국대학교 전신까지 학문적 종장의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 석전 박한영이었다.

8.15 해방 후에는 조선불교 초대 교정(지금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내장사에 내려와 수양하던 194848일 세속 나이 79, 법랍 61세에 내장사에서 신병 하나 없이 좌선 입정해 육신을 벗었다.

 

운기 성원, 석전의 강맥 계승

운기(雲起, 1898~1982) 스님 또한 근현대 한국불교에 있어 교학의 주춧돌을 놓은 강백이다. 스님의 법명은 성원(性元)이며, 운기는 법호이다. 운기스님은 석전 스님의 강맥을 이은 거목으로, 뒷날 많은 후학들에게 강맥(講脈)을 전수했다. 그의 전강제자들은 제방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불교 교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구암사 연혁과 문화재

634(무왕 35) 숭제법사(崇濟法師)가 구암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가장 먼저이다. 조선 태종 때 중창한 뒤 구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암사’(龜巖寺)라 함은 사찰 동편 지점에 수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밑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하였다. 당시 절터는 현재 구암폭포가 있는 부근이었다.

6.25전쟁 때 유적이 많이 소실됐고, 1957년 복원했으나 1959년 다시 불에 탔고 1973년 중창했다. 현재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두 동이 있다.

유물로는 절 입구에 설파 상언·백파 긍선·석전 한영 등의 부도가 있고, 불교 관련 최초의 언해서인 월인석보2000년에 구암사에서 제15권이 발견되어 보물 제745-10호로 지정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쓴 구암사 현판, 백파와 김정희가 주고받은 서간문이 남아 있었으나 6·25 전쟁 때 불에 타 사라지고, 1940년에 석전이 쓴 <중수 구암사기>(重修龜巖寺記)와 김정희가 쓴 편액 몇 편만이 전한다. 추사 김정희가 쓴 선운사 백파율사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 비문은 제자들에 의해 대대로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선운사에 보내져 비를 세웠다.

1930년대 구암사, 종걸 스님 제공
1930년대 구암사, 종걸 스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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