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34) 순창읍 가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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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34) 순창읍 가잠마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1.1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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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권씨 세거지, 순창고추장과 궁중음식 마을

가잠마을은 남산마을과 함께 순창읍 법정리인 가남리에 속하는 행정리다. 경지 정리와 수리 시설이 잘 되어 논농사를 위주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순창읍 농공단지가 형성되어 장류 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경천과 양지천이 합류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인구는 2021113일 기준, 58가구 88(남자 41, 여자 47)명이다.

 

마을 유래

 

마을 유래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마을 뒷산 형상이 잠두(蠶頭)이고 안산의 동산(童山)이 고치 형상이어서 누에가 네 번 자고 시렁 위에 올라가 고치를 만들고 있는 형상, 가상잠견(架上蠶繭)이란 말의 준말로 가잠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 개가 잠자는 명당이라 하여 개잠이라 불리다 조선 고종(高宗) 때 가잠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자봉포란(雌鳳抱卵) 형상이어서 아름다울 가() 봉우리 잠(), ‘아름다운 작은 산이라 쓰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있다.

가잠마을 전경
가잠마을 전경

 

입향조 권효(權曉)

가잠마을은 순창 지역 대표적인 안동 권씨 세거지이다.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행(權幸)을 시조로 하고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다 10세를 파조로 하여 14개로 분파되었다. 추밀원 부사를 역임한 10세 권수평(權守平)이 파조인 추밀공파(樞密公派)의 후예 만은(晩隱) 권효(權曉)가 조선 세조 연간에 이곳 가잠마을에 터를 잡았다.

권효(權曉)는 조선 전기 단종 때 순창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킨 충신이다. 안동 권씨 17세손이며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4세손이다. 자는 요일(堯日), 호는 만은(晩隱)이다. 세종 때 벼슬이 사정(司正)에 이르렀고, 단종 1(1452)년 수양대군이 고명 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수행해 중국 사람들에게 학문으로 존중받았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뒤 권효를 원종공신에 녹훈하고 크게 쓰려 했으나, 이를 고사하고 아내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했다.

권효의 장인은 설백민(薛伯民)의 아버지로,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의 부인인 설씨 부인의 고모부가 된다. 권효와 신말주 두 사람은 같은 시기, 같은 이유로 순창으로 낙향해 함께 교류하며 절의를 지켰고, 두 사람의 자손은 모두 순창의 명족이 되었다.

권효와 신말주가 순창에 자리 잡게 된 것과 관련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두 사람은 함께 터를 고르는 중이었는데 가잠마을과 남산마을 두 군데를 놓고 저울질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가잠은 부()가 보장된 땅이요, 남산대는 귀()가 보장된 땅이라는 것이었다. 권효는 가잠을 골랐고, 신말주는 남산대를 골랐다고 한다.

 

효우당(孝友堂)

효우당(孝友堂)은 누정 이름에서 나타나 있듯 권윤덕(權允德)과 상덕(商德)숭덕(崇德)준덕(俊德)민덕(敏德)종덕(種德) 여섯 형제가 효우(孝友)의 도를 다하며 거처했던 누정이었다. 이들 나이가 모두 연로해 노우당(老友堂)이라고도 불렸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1586년 순창군수로 재임 중에 이들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가상히 여겨 칭송하고 효우당이라 이름 지어 당호를 걸어 주었다. 소를 잡아 잔치도 베풀었으며, 8수를 지어 주었다. 현존하지 않아 누정의 형태와 변천 등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마을 입구에 효우당 6형제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효우당
효우당 효우비

 

권태식 홍문관 교리와 수라간 상궁

권태식(權泰植)은 가잠마을 출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형숙(亨叔), ()는 우국(又菊)이다. 부친은 권영석(權永錫)이다. 1879년 고종 16년 기묘식년시에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修撰)과 교리를 지냈다.

홍문관(弘文館)은 조선의 행정기관이자 연구기관이다.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의 하나로 옥당(玉堂)이라고도 한다. 정승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곳을 거쳐 갔다. 홍문관 교리(校理)는 경연과 문한(文翰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을 담당하며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고,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왕조실록고종 27(1890)1214일자에 권태식(權泰植), 곽기를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권태식과 곽기는 모두 중비(中批시험을 거치지 않고 임금 특명으로 벼슬을 시킴)로 제수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1907(순종 즉위) 홍문관을 폐지하면서 권 교리는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고자 했다. 당시 수라간 상궁 한 사람이 권 교리를 몹시 사모했다고 한다. 임금이 이런 상황을 알고 상궁에게 권 교리와의 동행을 허락했다. 이에 두 사람은 이곳 가잠마을로 함께 내려왔고, 상궁은 권 교리의 후실이 되었다. 가잠마을과 순창읍 사람들은 수라간 상궁 덕분에 궁중음식을 다른 지역보다 먼저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 교리와 상궁의 귀향은 순창 음식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권정수 부부 효열문

권성익의 5세손 권정수 부부는 부모의 사망을 못내 못 잊어 10년 동안이나 묘소에 상석을 올리는 등 효심이 지극했다. 이에 철종 임금이 현판을 하사해 1850년 효열문을 건립해 후손들에게 표상이 되도록 하였다. 1952년 멸실되었으나 2003년 복원했다.

효열문 뒤 좌측은 개항기 전통가옥인 권일택 가옥이고, 우측은 이기남 할머니 순창고추장의 본가이다.

효열문
효열문

 

이기남 할머니

고 이기남 할머니는 1인 창조기업의 대표적 인물이다. 집에서 담근 고추장과 장아찌 등 순창 전통 발효 문화의 맥을 이으며 여러 일손을 거느렸다. 타임지 표지 모델로도 선정되어 순창 발효식품을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지금은 둘째 딸과 셋째 딸이 운영하고 있다.

마을 가장 안쪽 충효문 바로 너머 오른쪽에 있는 이기남 할머니 집은 수백 년 묵은 듯한 아름드리 통나무 기둥과 수십 간 풍채가 종갓집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너른 뜰에는 장독이 가득 들어차 있고, 뒷마당에는 대숲이 펼쳐져 있다.

이기남 할머니는 1923년에 태어나 순창 대표 만석꾼 집안 맏며느리로 시집왔지만 이승만 정부 시절 농지개혁으로 만석꾼 재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편마저 40대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생계를 걱정하게 될 처지에 놓인 그는 지인들을 통해 고추장을 팔기 시작했다.

이기남 할머니의 고추장은 1980년대 후반 88올림픽 고속도로(현 광주대구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순창 토속 상품으로 고추장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자식들의 도움으로 가문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고추장의 사업성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섰고 나날이 번창했다.

이기남 할머니는 생전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2009)에서 시아버지 때 재산을 거진 다 찾았어. 옛날처럼 권 부잣집 소리는 못 듣더라도 마을 사람들 먹고살 일거리도 만들고, 내 할 도리는 했다 싶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기남 할머니 본가
이기남 할머니 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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