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37)동계 유산리(柳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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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37)동계 유산리(柳山里)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1.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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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리(柳山里)는 동계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이곳에서 순창읍남원임실까지 거리가 각각 16킬로미터(km)이다. 조선시대에는 남원부 성남방(城南坊)에 속했다가 후에 남원군 아동방 유산리로 불렸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가 되었다. 특산물은 밤은행매실 등이다. 202110월말 기준 인구는 25가구, 44(남자 19, 여자 25)명이다.

 

마을 유래

마을 뒤 산 형세가 죽 먹는 말()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죽말이라 불렀다. 이곳에 나주 임씨가 정착한 것은, 전라남도 나주 회진에 있던 임한이 임진왜란 즈음에 가솔을 거느리고 남원군 아동방 유산리에 속해 있던 이곳 죽말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부터다. 임한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 판사로 남원산성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아동방 오암굴에서 8년을 쑥을 캐어 먹으며 연명했다고 전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충인(林忠仁)은 인근 주민 100여 명을 이끌고 만산에 이르렀다가, 임금이 청군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해 통곡한 후 귀향해 샘보 위 농로 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그 후 마을 이름이 유산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유산리 전경

 

서당과 향학열

옛날에는 유산리수정리주월리신흥리이동리 5개 마을에 서당이 있었는데 화창한 날을 택해 각 마을 학동을 한 자리에 모아 매년 1회 강시(강시)하였다. 장원에게는 상을 수여하는 등 향학열이 대단했다고 한다.

 

오암사와 회림각

오암사(鰲菴祠)는 조선 후기 순창 출신 청백리 임용진(林龍鎭)과 임문수(林文洙)를 모신 사우다. 유산리 삼봉산 기슭(유산길 40-10)에 있다. 사우 명칭은 임문수의 호를 따서 오암사라 했다. 목조 기와지붕으로 정면 3, 측면 1칸의 건물이다. 향사일은 설추석동지정월대보름에 차사(茶祀)로 거행하고 있다.

임용진(林龍鎭1756~?)은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양여(養汝), 호는 화수당(花樹堂)이다. 아버지는 임창원(林昌遠)으로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태어났다. 1816(순조 16)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을 거쳐 전라도사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성품이 정직하고 처사가 분명해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임문수(林文洙1802~1883)는 동계면 유산리 출신으로 자는 성배(聖配), 호는 오암(鰲菴)이다. 아버지는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이며, 임용진의 종질(從姪)이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면이 많았고, 재예(才藝)가 남달랐다. 1849(헌종 15)에 문과 식년시 병과 9위로 합격해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1849(헌종 15) 문과에 급제, 내직으로 정자(正字)박사(博士)지평(持平)정언(正言)집의(執義) 등을 거쳐 이조 정랑병조 참의가 되었다. 1879(고종 16) 병조 참의로 있을 때 지은 상소문은 관고(官庫)3년 동안의 비축미가 없음을 알고 그 대책을 올린 글이다. 외직으로 은계찰방(銀溪察訪)과 삼례찰방(三禮察訪) 등을 지내며 청백리로 선정을 펼쳐 명성이 높았다. 나주 임씨 절도공파 종중 유품에는 임문수의 유품과 함께 홍패와 교지가 많이 남아 있다.

나주 임씨 절도공파 종중은 오암사와 함께 회림각(會林閣)을 세워 선조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유품 가운데 임용진과 임문수의 유품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왕에게 받은 홍패(紅牌)와 교지(敎旨), 머리에 쓰는 종이꽃(紙花지화)인 어사화(御史花), 햇빛을 가릴 때 쓰는 일산 등과 문집 등 유품 58점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 나주 임씨 절도공파 종중 유품(羅州林氏節度公派宗中遺品)이라는 이름으로 19926월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오암사
오암사
회림각
임문수가 받은 교지
임문수 과거시험 채점표

 

용유사에서 공부해 급제한 임문수

동계 유산리 나주 임씨는 임진왜란 때 이 마을로 피난해 살면서 수대를 무관으로 살았다. 원래 양반 후손으로 많이 노력했으나 대과에 급제하지 못함을 늘 한탄했다. 임문수 아버지는 오수장에서 포목장사를 하면서도 자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임문수를 무량산에 있던 용유사(龍遊寺)에 보내 놓고 사흘이 멀다 하고 아들이 먹을 식량을 짊어져다 놓았다. 쌀을 짊어지고 가서 밤늦게 글을 읽는 것을 들으면 소리 없이 쌀을 마루에 놓고 돌아오곤 했다.어느 날 장사를 마치고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용유사를 가는 날이기에 쌀을 짊어지고 밤중에 올라가는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임씨는 몹시 화가 났으나 이것은 아들의 잘못이 아니고 자기가 부덕한 것이라 개탄하고 지붕 끝 낙숫물이 떨어진 곳에 꿇어 앉아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들 임문수가 문을 열어 보니 아버지가 낙숫물 속에 꿇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뛰어나갔다.그때 아버지 하는 말이 도련님! 도련님 덕으로 양반 한 번 됩시다였다. 임문수는 글을 읽지 않고 잠잔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글 읽는 것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문득 잠이 올 때면 아버지가 낙숫물 떨어지는 처마 밑에 꿇어 앉아 아들에게 도련님이라 부르던 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임문수는 대과에 급제했고, 전라도사 병조정랑의 벼슬을 지냈고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준 아들로서 유산마을 나주임씨 중조가 되었다. 그 후로 용유사는 유명한 사찰이 되었고, 용유사에서 공부하면 급제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렇게 유명한 사찰이었으나 어느 때 폐찰 되었는지 그 전설만 전해 올 뿐이다.

 

학암정(鶴岩亭)

유산리 유산저수지 앞 남쪽 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순창 지역 나주 임씨 입향조 군자감판사(軍資監判事) 임한(林漢)의 후손들이 1901(고종 38)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누정이다. 옥천(玉泉) 조민식(趙敏植)이 지은 <학암정기>(鶴岩亭記)와 계봉(溪峰) 장영식(張令植)이 지은 시가 걸려 있다.

학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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