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쪽빛한쪽(14) 고창군 부안면 이강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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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쪽빛한쪽(14) 고창군 부안면 이강오 씨
  • 선산곡 작가
  • 승인 2022.11.2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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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곡 작가

 

이른 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묻고 있었다.

누구?”

처음엔 잘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두 번째 자기 이름을 밝히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긴 터널에 묻힌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 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참으로 완벽하게 잊힐 수 있었을 단편들이 그 목소리 하나로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떤 잠재력이 있어 그가 나를 잊지 않았고 나 또한 그를 잊지 않고 있었을까.

우리가 처음 만나고 마지막 헤어지기까지는 굳이 셈까지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이었다. 함께 겪은 공존의 기억은 단 하나도 없는, 굳이 말하자면 입대 한 달 차의 전우(戰友)관계일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인연이 있었으면서도 인연을 잊고 살았던 세월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비록 짧았지만 가장 소중한 것들이 50년 세월이 흐른 뒤 확인되었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아침에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50년 만의 만남이 꼭 설렘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월의 무상함도 문득 서글펐다. 그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나는 어떻게 변한 모습으로 그에게 비추어질까. 우리의 인생은 그 옛날 싱싱했던 열망을 잘 마무리한 것일까.

만남 장소에 차가 들어서자 서성거리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는 나에게 다가오는 잰걸음은 50년 전 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껴안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겉보기엔 담담했을지 몰라도 포옹은 감격이었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흔적이 그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에 나의 모습도 그랬을 것이다.

긴 시간 우리들의 이야기는 한때의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짧았지만 그 공간에서 얻은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군대 사진 딱 두 장 뿐이여. 제대하면서 군인 흔적 지운다고 왜 다 태워버렸는지 몰라.”

그가 흑백사진 두 장을 꺼내오며 하는 말이었다. 그 옛날 스무 살 청춘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내 기억 그대로, 그때의 모습을 확인시켜주는 빛바랜 사진, 일등병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사진 아래 써진 19711226, 그 사진 밖 그날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화재 사건이 각인된, 암울했던 신병(新兵)들의 감성 기록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차에 실어준 화분의 국화꽃을 바라본다. 대국(大菊) 노란빛이 어쩐지 가슴 시려온다. 오른손 중지 손톱을 깊게 깎았는지 욱신욱신 아려오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고통이라고 할 수 없는 이 통증들은 그와 만난 뒤의 내 감회와 어쩌면 닮은 것도 같다.

갑자기 모차르트의 곡이 듣고 싶다. 누가 연주해도 좋을, 피아노 협주곡 232악장 아다지오. 달콤한 통증의 강을 건너기에 이 곡처럼 어울리는 게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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