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 역사(35) 원나라 지배기 고려 매국노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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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 역사(35) 원나라 지배기 고려 매국노 열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4.0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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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교과서에는 고려말기의 원나라 지배기를 원 간섭기라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만큼은 아니었어도 고려말 원나라 지배기도 식민지와 비슷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40년에 걸친 대몽항전 끝에 개경 환도와 삼별초 항쟁 진압 과정에서 원나라는 다루가치를 설치한다. 다루가치란 진압하는 자라는 의미로 몽골의 관직이다. 총독부와 비슷한 의미로 1278년 충렬왕 시기까지 존재한다. 더구나 충렬왕부터 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까지 일곱 명의 고려 국왕은 원나라 황족의 사위로서의 자격을 가지고서야 왕에 임명되었다.

민족 수난기였던 원나라 지배기에 나라 안팎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적의 앞잡이가 되었던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부원배(附元輩)라 한다. ‘원나라에 붙어먹고 살던 무리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다수 친일부역자의 행각과 동일선상에 있었던 인물들이다.

 

홍복원과 홍다구·홍중희

원나라 지배기 첫 부원배는 홍복원(洪福源)이다. 그는 원래 당성(唐城) 사람인데 선조가 인주(麟州·평안북도 의주 지역의 옛 지명)로 이주했다고 한다. 1231(고종 18)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골군이 쳐들어오자(몽골군의 1차 침입), 인주를 지키던 홍복원은 이들을 맞이해 투항했다. 그는 항복한 데 그치지 않고 몽골군의 길잡이 역할을 자임했다.

고종 20(1233) 서경 낭장으로 있을 때는 아예 반란을 일으켜 서경 땅을 몽골에 바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무신정권 지배자 최우가 가병 3000을 보내 진압해 실패로 끝났고, 홍복원이 원으로 도망가자 최우는 그의 아비 홍대순과 처자 및 동생 홍백수를 포로로 잡았다. 원으로 간 홍복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고려를 치라며 끊임없이 원을 부추겼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려 침공 때마다 앞잡이가 되어 따라들어 왔다.

후에 몽고에 볼모로 간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과 사이가 나빠지자 몽고 황족 출신인 영녕공 준의 부인이 황제에게 일러바침으로써 황제가 보낸 10여 명의 장사에게 맞아 죽었다.

홍복원의 아들 중 홍다구(洪茶丘)는 이 일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그는 1261년 아비의 원한을 씻고자 황제에게 진언했고, 2년 만에 복권돼 고려군민총관이란 벼슬을 받아 투항한 고려 관민을 통할(統轄)하게 되었다. 권세를 쥔 홍다구 형제는 아버지를 죽인 개인적 원한을 잊지 않고 고려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삼별초의 난 진압에도 앞장서 반란군의 왕 승화후 왕온을 직접 잡아 죽였다. 원의 일본 정벌에도 참여해 고려에게 함선 건조를 심하게 닦달하는 등 착취에 앞장섰다.

홍복원의 손자 홍중희는 요동 등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호 세력이었다. 그는 고려 충선왕이 흥선태후와 합세해 원 무종 옹립에 공을 세워 심왕’(瀋王)으로 봉해지자, 충선왕을 견제하기 위해 그 유명한 입성책동’(고려를 원나라 행정구역으로 편입하고자 했던 시도)을 일으켰다. 고려왕과 심왕을 겸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지의 주장을 여러 번 펼쳤고, 틈만 나면 충선왕을 참소했다.

 

<쌍화점> 만든 오잠

충렬왕 집권기 오잠(吳潛)의 행태는 간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정통 관료였음에도 왕의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비서 격인 승지로서 왕의 전속 악단을 조직했고, 전국을 돌며 미인 기생을 선발하고 개경의 무당과 관비 중 가무에 능한 자를 뽑아 남장을 시킨 뒤 일종의 뮤지컬을 공연하기도 했다. 향각이란 왕실 전용극장에서 이뤄진 공연 중 지금도 가사가 전하는 고려가요 <쌍화점>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오잠의 행위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충렬왕의 뒤를 이어 충선왕이 즉위한 뒤 실권을 잃자 유청신(柳淸臣) 등의 구세력과 함께 고려 사직을 원나라에 바치려 했다. 1323(충숙왕10) 정월, 원나라 황제에게 입성책동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 “요동지방과 고려를 한데 묶어 행성(行省)을 설치해 삼한성(三韓省)으로 원나라 내지(본국)와 같이 하여 주시옵소서.”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식민지로 만들자는 이른바 2차 입성책동이었다. 고려가 원의 부마국가로 존속하기보다 아예 원나라의 일부가 되는 것이 자신과 가문의 영달에 득이 된다고 생각했다.

 

환관 고용보

고용보(高龍普)는 본래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였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에서 매·인삼 등을 징발해 가면서 화자’(성 불구자)도 데려가 환관으로 활용했는데, 고용보 또한 이 과정에서 원으로 넘어가 환관이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333년 기자오의 딸을 원 황제의 궁녀로 들여보냈고, 내시 박첩목아불화(朴帖木兒不花) 등과 협의해 그녀를 순제(順帝)의 제2황후로 승격시키고 측근으로서 그녀의 권세를 등에 업고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임명되었다. ‘자정원은 기황후의 재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이를 관리하는 관직을 하사받은 고용보는 기황후의 심복이 되어 본국인 고려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를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충혜왕을 몸소 꾸짖기도 했다.

1343,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의 악행이 원나라까지 알려지게 되자 원 조정에서는 충혜왕의 폐위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고용보는 이 시기에 황제가 하사하는 의복과 술을 전달하기 위해 고려를 방문했다. 이에 충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조서를 접수하기 위해 정동행성으로 행차했는데, 도치 등이 왕을 발로 차고 결박해 잡아가면서 고용보에게 고려 내정을 맡겼다. 이후 그는 기철 등과 함께 내탕고를 봉인한 후 원나라로 돌아갔다.

당시 고용보가 황제 가까이 있으면서 권세를 휘두르자 원나라 어사대(御史臺)에서도 그를 탄핵했다. 금강산으로 추방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영록대부가 되었다. 뒤에 자정원에서 밀려나 고려로 돌아온 뒤 승려가 되어 해인사에 있던 중 13622월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에게 처형되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

 

기황후와 그 일족

기황후(奇皇后·1315~1369)는 행주 사람으로 총부산랑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고려 공녀 중 가장 크게 출세했던 여성이었다. 어린 순제를 사로잡아 아들 애유식리달랍(뒤의 북원 소종)을 낳았고, 끝내 제2황후에 올랐다. 원의 황후는 몽골족의 2대 유력가문 출신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지만 고려 출신 환관들과 그녀의 술수로 꿈을 이뤄냈다.

기황후는 권력을 잡자 자정원이란 황후의 부속관청을 설치했다. 이곳에는 고려인 환관만이 아니라 원나라의 고위 관리들도 포함돼 자정원당이란 세력을 형성했다. 그녀는 권력을 잡는 데 미인계를 쓰기도 했다. 고려 출신 미녀들을 다량 보유한 뒤 이를 원나라의 실력자에게 보냈던 것이다. 고려 여자를 처첩으로 얻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의식도 퍼져 고려 여성의 주가가 높아지기도 했다.

기황후를 여걸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원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황실 내부 권력 투쟁의 1인자였을 뿐이었다.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을 개인의 영광으로 치부할 수는 있어도 고려의 입장에서는 원나라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불행이었다.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 고려에 있던 그의 오빠 기철을 비롯해 기씨 일족은 전횡을 일삼았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맘대로 빼앗고, 국왕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기황후의 모친 생일을 위한 잔치에 5000필이 넘는 베를 써 물가가 오를 지경이었다.

특히 기철(奇轍·?~1356)은 충혜왕 때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자는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공민왕의 반원자주화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갖은 책동을 부렸다. 그는 원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았는데, 1340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요양행성(遼陽行省)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임명된 뒤, 대사도(大司徒)에 이르렀다. 고려에서도 정승에 임명된 뒤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원나라에서 치르는 공식행사에서 고려왕과 동급이거나 더 우대받았으므로, 원나라는 물론 고려에서의 위세가 매우 컸다.

기철은 친척과 심복을 주요 지위에 포진시키고 자신을 도울 일당들을 은밀히 요소요소에 심었다. 또한 장차 반역을 꾀하고자 권겸·노책 등과 공모해 은밀히 날짜를 정해 거사를 계획했다. 1356년 이를 눈치 챈 공민왕은 연회를 베푼다는 핑계를 대고 궁궐에 장사들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입궐하는 기철 일당을 습격해 철퇴로 때려죽였다. 기철의 시체는 저잣거리에 버려졌고, 분노한 백성들이 그의 시체를 난도질했다. 기철의 처자식과 인척들은 물론, 기철에게 빌붙어 권세를 휘두르던 부원배들도 이때 몰살당했다.

일족의 몰살에 분노한 기황후는 충선왕의 서자였던 '덕흥군 왕혜'를 고려국왕으로, 자신의 조카 '기삼보노'를 세자로 세우고 최유에게 1만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격하도록 했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격퇴된다.

 

기황후와 경천사지 10층석탑

기황후의 흔적을 담고 있는 국보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박물관 전시동 1층 중앙에 전시된 높이 13.5m경천사지 10층석탑’(국보 제 86)이다.

경천사는 고려 전기 황해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기슭에 창건된 절이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폐사됐지만 탑은 그대로 남았다. 경천사지 10층석탑은 고려 말 충목왕 때인 13483월에 조성됐다. 조성 시기와 경위를 알 수 있는 것은 1층 몸돌(탑신석)에 명문이 있어서다. 명문은 연대와 발원자, 조성 배경을 기술하고 있다.

“(탑은) 대화엄 경천사에서 1348(고려 29대 충목왕 4) 3월 세워졌다. 발원자는 중대광 진녕부원군 강융, 원사 고용보, 대화주 성공, 법산인 육이이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조성하였다.”

강융은 관노 출신이었지만 딸이 원나라 승상 탈탈(1314~1355)의 애첩이 돼 권세를 누렸다. 고용보는 위에 기술한 것처럼 고려 출신 환관으로 원나라 공녀였던 기황후를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경천사지 석탑 건립의 주도적 인물들은 핵심 부원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안녕을 기원했던 황후는 바로 기황후이고, 황태자는 그녀 아들인 아유르시리다르(북원의 소종)이다. 독특한 조형미와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의 탑이지만 탑을 세운 목적부터 친원적이었다.

참고로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수난도 많았다. 19072월 순종 결혼식에 일본 특사로 참석했던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탑을 일본으로 무단 반출했다가 국내외에서 비판 여론이 커지게 되자 결국 1918년 다시 국내로 반환하게 된다. 해방 후 1960년에 이르러서야 탑은 다시 복원 되고, 문화재청은 탑을 경복궁 마당에 세워놓았다.

그런데 이 탑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탑이고, 대리석은 산성 물질에 녹아내리는 성질이 있다. 게다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다 보니 온갖 공해로 인해 산성비가 자주 내리고, 탑 부식이 점점 심각해지게 된다. 이에 문화재청은 탑을 실내로 옮기기로 한다. 1995년 경복궁 마당에서 해체되어 9년 동안 보수 처리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2005년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1층 복도에 새로운 거처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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