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역사(34) 신돈, 요승인가 좌절된 개혁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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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역사(34) 신돈, 요승인가 좌절된 개혁가인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3.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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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조(遍照) 신돈(辛旽·?~1371)은 고려말 조선초 집권세력이 펴낸 고려사를 통해 지난 600여 년 동안 요승(妖僧)’으로 낙인찍혀 왔다. 역사상 어떤 인물이 그처럼 혹독한 비난을 받은 사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돈에 관한 기록은 부정적이고 악의적이다.

처첩을 거느려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졌다”, “남의 처첩(妻妾)을 빼앗는 건 신돈 때부터 시작되었다등 문제의 핵심과 관계없이 인신공격을 하고 있다. 신돈이 실제로 첩을 거느려 아이를 얻기도 했지만, 남의 처첩을 빼앗는 일을 어찌 신돈이 시작했겠는가?

일부 학자들이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부터이다. 신돈은 요승이 아니라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공민왕에게 전격 등용돼 정치에 입문한 후 기득권층에 맞서 왕권 강화와 민생 구제를 실현하려 했던 비운의 개혁가라는 것이다.

 

출생과 신분

신돈은 화엄종 계통 승려로, 어려서 출가했다. 아버지는 경상도 영산(靈山·현 창녕군)에 사는 부호 신씨이고, 어머니는 영산 계성현 옥천사(玉泉寺) 사비(寺婢) 박씨였다. 하지만 모계 혈통에 따라 종의 신분으로서 절에서 자랐고, 신분 때문에 다른 승려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산방에 홀로 떨어져 살았다.

미천한 신분과 승려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신돈은 자기 향상에 매진했다. 그는 매골승(장례 의식에서 시신을 땅에 묻고 명복을 비는 역할을 담당한 승려)으로 활동했다. 이때 불당을 찾는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 신자들을 감동케 했다고 한다.

 

개혁 추진한 공민왕의 남자

고려 말의 화두는 개혁이었다. 정치·경제적 특권을 독점하고 있는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왕권을 강화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역사적 과제였다. 공민왕 이전에도 충선왕·충숙왕·충목왕 등의 개혁이 있었다. 공민왕 때도 신돈이 등장하기 전 몇 차례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개혁 주체 세력이 곧 개혁 대상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고려의 마지막 희망공민왕은 신돈이라는 승려를 기용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는 간단하다. 기득권세력과 관계를 맺지 않아 눈치 보지 않고 개혁이 가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말에 의하면,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 등장한 신진 관료들도 집안이 한미한 것을 감추려고 귀족과 혼인으로 얽혀지고, 유생들은 문하생끼리 뭉쳐 있어 모두 개혁의 주도세력으로 마땅하지 않아 세상을 버린 초연한 사람을 뽑아 폐단을 개혁하려 했다고 한다.

신돈은 공민왕 14년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민왕 8년을 전후해 이미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7(1358)년 개혁을 주도하던 이제현(李齊賢)이 사직을 청원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때 신돈은 공민왕의 측근이자 명덕태후의 인척인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공민왕과 만나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전날 어떤 사람이 칼을 빼들고 자신을 찌르려고 할 때 어느 승려가 다가와 구해 주는 꿈을 꾸었는데 다음날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와 인사시켰다.

신돈은 집권 이전에 이미 무신(중방·최영), 측근(정세운·유숙), 문신(김속명·백문보)에게 심한 견제를 받았다. 공민왕 11년 강경한 반대자인 정세운이 죽은 뒤 신돈은 정계에 복귀한 듯하다.

 

정치·군사·법률 총괄한 사실상의 왕

공민왕 14(1365)2월 만삭의 몸이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하고 죽자,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왕사인 신돈에게 정권을 내맡겨 조신(朝臣)들을 견제하게끔 하고서 공민왕 자신은 불사(佛事)에 전념했다.

동년 5월 공민왕은 승려 편조(遍照)를 국사(國師)로 삼고 모든 국정을 자문했다. 편조는 집권 뒤 공민왕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공민왕은 정치 전면에서 퇴장했고, 신돈에게 왕과 동일한 권력을 부여했다. 이후 6년간에 걸친 신돈의 섭정시대가 펼쳐졌다. 장년의 왕이 스스로 왕권을 포기하고 타인을 대리인으로 세운 것은 한국 역사에서도 유일한 사례이다.

동년 12월에는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내렸다. 요컨대 신돈이 부여받은 직위는 정치·군사·법률·종교를 총괄하는 것이었다. 품계는 정1품이지만 사실상 왕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인적 교체와 민생 안정

신돈이 생각했던 개혁 방향은 인적 교체와 민생 안정이었다. 공민왕 145월부터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진행했고, 공민왕 155월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며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신돈이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인적 물갈이였다.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지 30일 만에 최영을 비롯한 당시 유력한 고위 관리들을 일거에 교체했다. 구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신돈은 새로운 관리들을 많이 등용한다. 인사원칙은 현량(어질고 착한 인사) 천거였다. 이를 위해 유교진흥책을 추진했으며, 교육과 과거제도에 대한 개혁, 국학(國學) 정비가 추진됐다. 유교진흥정책에 힘입어 이 시기 많은 신진사대부(김구용·이숭인·정몽주·정도전·윤소종 등)가 성장할 수 있었다.

인사개혁을 마무리한 신돈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하려 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이를 위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했다. 책임자인 판사(判事)를 맡아 개혁의 깃발을 든 신돈은 당시 농장(農莊)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신돈은 우선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농장의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신돈을 음탕하고 요사스러운 중으로 악의적으로 묘사한 고려사도 이 부분은 온 백성들이 성인이 출현했다”, “문수보살의 후신이다며 기뻐했다고 쓰고 있다. 노비와 토지를 잃은 권문세족과 귀족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라고 비방했다.

 

무너진 개혁의 꿈

신돈이 토지개혁을 과감하게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공민왕의 절대적 신임과 농민들의 지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돈이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자 공민왕은 신돈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혁대상세력인 기득권세력(권문세가·귀족 비호 불교세력)은 신돈을 저주하고 모함하고 반발했다. 불교에 배타적이었던 신진사대부들과의 알력도 신돈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1369년 초 신돈은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고 사심관제도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공민왕과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때부터 공민왕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공민왕은 마침내 137010월 친정(親政)할 뜻을 밝히기에 이른다.

공민왕은 자신의 심복에 가까운 대신(大臣)이라도 그 권세가 커지면 제거하고 말았다. 고려사왕의 성품이 시기가 많고 잔인해, 비록 복심(腹心)의 대신이라도 그 권세가 성하면 반드시 시기해 이를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이러한 입장 차이는 기득권 세력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공민왕 18(1369)7,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選部) 의랑(議郞) 이인(李韌)은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이름을 속이고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글을 써 명덕태후 외척인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몰래 보냈다. 김속명은 이를 공민왕에게 보고했고 신돈은 곧 공민왕 살해 역모 고변에 휘말려, 수원부(水原府)에 깊숙이 갇혀 있다가 2년 만인 1371(공민왕 20) 7월 기현·이춘부·이운목과 함께 사형장에서 참수됐다. 기득권 세력의 폐해를 바로잡으려던 신돈이 요승과 반역자라는 오명만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향년 49세였다.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나

신돈의 개혁정치는 한 정치가의 개인적인 도덕성과 개혁의지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개혁을 수행할 정치집단을 구비하고 있지 못할 경우, 그 정치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은 성인이니 신승이니 혹은 문수의 후신이니 하며 그를 추종했다. 그러나 개혁 대상으로 몰린 기득권 세력은 사승이니 요승이니 하면서 그를 깎아 내리고 공격했다. 신돈에 대한 기득권층의 비판은 뇌물과 아첨, 여자를 밝히고 호화주택을 소유했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가 개혁 과정에서 토지나 노비를 부정 축재했다는 자료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신돈이 모반죄로 처형당하자 개혁 대상으로 몰렸던 세신대족·초야신진·유생 등의 기득권 세력은 다시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신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13741388)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만 해도 그렇다.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그 아들인 창왕(13881389)의 기록을 열전반역조()로 분류하고 있다. 두 왕이 신돈의 자손으로서 왕위를 도둑질했기 때문에, 다른 왕들의 기록과 같이 세가에 모아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민왕이 당시 일곱 살이었던 우를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할 때에 어느 누구도 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제기되지 않았다. 심지어 우왕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함께 폐위될 때도 그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았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창왕 1(1389)11월 우왕이 이성계를 죽이고 복위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기되었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예라고 주장함으로써 왕을 처형했다는 혐의를 면하고자 한 것이다. 이색·정몽주·정도전 같은 신진관료들도 불교를 배척한 성리학자인 만큼 승려인 신돈에게 반드시 호의적인 것은 아니어서 반역 혐의로 죽은 신돈을 비호해 줄 이유가 없었다. 신돈은 불교계에서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사원이 가진 땅이나 노비가 많아 개혁의 대상인데다가 신돈의 종파가 이 시기에 그리 힘이 없던 화엄종 쪽이었다.

결국 신돈은 농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자신의 정치세력 형성에 실패한 탓에 요승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도덕적 결백이 요구되는 승려였던 그가 끊임없이 성 추문을 일으켰다는 개인적 행태 때문에 민생 안정을 위해 그가 추구한 개혁까지 부정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 건국 주도세력들마저도 신돈이 추구했던 개혁에서 그 개혁의 방향을 찾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 그렇다.

창녕 옥천사지
창녕 옥천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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