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쪽빛한쪽(17)다시 쓰는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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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쪽빛한쪽(17)다시 쓰는 답장
  • 선산곡 작가
  • 승인 2023.02.2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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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곡 작가

 

그해 겨울 병영에서 받은 엽서의 마지막 글귀가 하얀 전선에서 동생이었다. 나는 이제 70여일 전역을 기다리는 몸이었고 그는 입대한 지 겨우 1년 차인 일등병 신분이었다. 먼저 가서 기다려달라는 말보다 나를 울컥하게 했던 것은 뜻밖에도 하얀 전선이라는 네 글자였다. 하얀 전선의 풍경에 비할 수 없는, 차가운 현실에 동댕이쳐진 우리들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아웅다웅 격()이 없었던 우리들이 지닌 정리가 새삼스러웠지만 애련(愛憐)이 앞서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얀 전선 너의 풍경에도 지금쯤 밤이 왔겠다.

언젠가 쌓였던 눈이 녹고 봄이 오겠지.

 

동그라미 하나 그려 오늘을 지우지만

또 하나의 그리기는 내일의 몫

그러나 소중히 해야만 하는 것들은 오늘에 있다

긴 날을 잊은 듯 잊지 못했던

가슴에 움터오는 정리는 그대로 두고

눈 덮인 그 땅 위에 굳게 서 있어라

 

뜨겁다 외치며 찬물에 손을 담가

너와 헤어진 동안의 그리움을 씻는다

욕망을 씻으며

오욕을 씻으며

녹슨 세월을 씻는다.

 

19742240237

 

그 새벽에 쓴, 조금 늦은 답장이었다. 필기 본을 남겨둔 습관 때문에 다시 볼 수 있었던 이 글은 286컴퓨터 때 정리해 둔 것이었다. 우연히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나는 조금 놀랐다. 오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게 하고픈 말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기다림의 역할만 달라졌을 뿐. 세월이 그만큼 흘렀어도 하얀 전선의 편지를 받았을 때 고개를 숙이고 울었던 내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때의 내 애련의 심사를, 그 눈물을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씻는다던 녹슨 세월이 어찌 지금에 비할 것인가. 비로소 지금, 씻어야할 것들이 눈앞에 있다.

그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을 보며 그의 이름 불러본 것도 엊그제의 일이었다.

.”

나를 부르는 소리 들리는 듯, 청춘의 얼굴이 비탄으로 다가오던 것도 얼마 전이었다.

그해 받았던 그 답장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 쓰는 편지로 다시 읽고 있을 것이다. 지금 멀리 떠나 그가 있는 그 곳은 어떤 풍경일까. 어쩌면 발자국도 보이지 않고 그늘도 없는, 하얀 풍경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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